출전: Guenter Kunert: Nachwort, ders. Diesseits des Erinnerns, Muenchen 1985.
“오늘 나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의 두려움은 순식간에 약화되었지만, 나의 걱정은 오히려 더욱더 성장했다고. 이 말은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나, 쉽게 해명될 수 있습니다. 전자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후자 속에는 보편적인 특성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걱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촛불처럼 꺼질지 모른다는 게 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더 이상 숨 쉬지 않고, 더 이상 글 쓸 수 없다는 상태를 생각해 보세요. 나의 두려움은 억압의 어떤 결과였습니다. 억압의 결과로서의 두려움 그리고 억압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
두려움의 원인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 눈앞에서 사라졌다면, 증가하는 걱정이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나의 걱정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장차 미래를 맞지 못하리라는 비밀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는가요? 생태계의 파괴 - 그것은 우리의 걱정입니다. (...) 우리가 단백질 부족, 비타민 부족, 의약품의 부족으로 꼬꾸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리를 지어 맞아죽거나 고문당해 죽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산업 사회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모든 세계의 사람들이 가난을 떨치기 위해 끝없이 추구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아홉이면 아홉의 신흥 국가는 공명심만을 지니고 군비 확장 내지는 산업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은 자신을 살해하는 방식만을 고수하고 있으며, 어떠한 다른 대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국가는 언제나 허덕거리면서 자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
몇 년 전에 사람들은 “인구 폭발”을 거론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그 이후 많이 사용되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의 폭발이란 파괴의 일회적인 행위입니다. 단 한 번의 파괴 다음에는 다시금 조용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성장은 제어할 줄 모르고 곪아터진 종양과 같습니다. 내부에서 조금도 쉴 틈 없이 계속 번지는 종양을 생각해 보세요. 인구가 최대한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착취 행위를 최대한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통계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1500명 내지 2000명의 아이들이 물 부족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냥 목말라 죽는 것입니다. (...)
인간 동물에게 자의에 의해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한하는 능력이 생물학적으로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웃, 자식, 손자 그리고 후세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의 삶을 제한할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
반신 (半神)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불로써 산업 문명의 시작을 주도하였습니다. 대신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의해서 벌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세대에 의해서 문화의 영웅으로 추앙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걱정하는 바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설의 두 번째 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교활하게 계산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선사할 때 당시에 인간이 지니고 있던 미래의 예견 능력을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래의 예견력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반신은 “프로메테우스 (Pro + Metheus, 앞을 미리 내다보는 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는가요?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절단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습니다. 만약 미래를 예견할 능력을 계속 지니고 있다면, 인간이 불을 받을 리 만무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 우리는 지금까지 프로메테우스를 혁명적 정신 내지 창조성의 상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실제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신화의 의미를 지금까지 간과해 왔습니다. (...)
'45 동독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쿠네르트의 "박쥐의 외침" (국문) (0) | 2018.11.21 |
---|---|
서로박: 브라쉬의 '아버지보다 아들들이 먼저 죽는다' (0) | 2018.11.14 |
서로박: 쿤체의 '멋진 세월' (0) | 2017.07.22 |
서로박: 퓌만의 유대인 자동차 (0) | 2017.07.15 |
서로박: 비어만의 '드라 드라' (0) | 201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