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대 문헌

서로박: (1)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필자 (匹子) 2025. 3. 14. 11:03

1. 고대 그리스의 불세출의 극작가, 소포클레스 (Sophokles, BC. 497 – 406)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엘렉트라」와 함께 소포클레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오랜 기간 여러 지역에서 수없이 공연되었습니다. 소포클레스는 생전에 총 123편의 연극작품을 발표했는데,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불과 7편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어찌 소포클레스의 문학을 속속들이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일곱 작품 속에서 우리는 비극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일곱 작품 모두 명작입니다. 이 가운데 「안티고네」는 연대기 순서에 따르면 「트라키아 여인들」, 「아이아스」 다음에 배열되는 작품으로서, 기원전 442년, 혹은 그 이전에 공연된 것으로 추측될 수 있습니다. 사실 소포클레스는 이 작품이 공연된 직후에 페리클레스의 책사가 되어 사모스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이는 기원전 441년에서 439년 사이에 아테네와 사모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서 아티카 지역의 존립과 이권 다툼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이때의 전투는 기원전 431년에 발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2. 작품에 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안티고네의 쌍둥이 남동생입니다. 테베 사람들은 우여곡절 끝에 피폐해진 고향 땅을 바로잡기 위해서 무력으로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쌍둥이 남동생은 제각기 두 세력의 대표로서 서로 피비린내 나게 싸웁니다. 그들은 모두 전사하고, 어부지리를 통해서 테베의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크레온이었습니다. 권좌에 오른 뒤에도 그는 테베 군인들을 정파적으로 나누어 에테오클레스 사람들을 옹호하고, 도시를 침탈하려고 한 폴리네이케스 부하들을 배척했습니다.

 

크레온의 근시안적 태도는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만,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높은 언덕에 내버려 두게 합니다. 뒤이어 하나의 칙령이 공표됩니다. 즉 폴리네이케스는 역적이므로,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埋葬)하는 자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칙령을 통해서 크레온 왕은 자신의 편파적인 오만불손함을 만천하에 알렸던 것입니다. 왕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나중에 들이닥칠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3.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습니다. 먼 훗날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친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른 다음에 고행의 방랑길에 오릅니다. 이전의 오이디푸스가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왕이었다면, 두 눈을 잃은 오이디푸스는 자기반성을 추구하는 현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여동생인 안티고네는 아버지를 따라 고행의 방랑에 동행합니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테베로 돌아온 안티고네는 쌍둥이 남동생이 테베의 권력을 놓고 피비린내 나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미는 절망적 상태에서 동생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동생의 사망보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크레온 왕의 칙령이었습니다. 크레온 왕은 에테오클레스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맹금의 밥이 되도록 언덕에 내팽개쳤습니다. 안티고네에게 중요한 것은 크레온 왕이 공표한 실정법이 아니라, 천륜이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서로 만나, 크레온 왕의 칙령이 너무나 잘못된 것이라고 토로합니다. 여동생이 신중한 자세로 비밀리에 처리하라고 조언했을 때, 안티고네는 이를 새겨듣지 않습니다.

 

4. 죽은 동생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서든 장례를 치르고 매장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판단합니다. (1 – 99). 말하자면 크레온 왕의 칙령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륜의 법칙에 어긋난다는 게 안티고네의 지론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티고네라는 이름이 어원에 의하면 “꺾이지 않는 자”라는 뜻을 지닌다는 것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안티고네는 끔찍한 형벌을 감수하더라도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묘지에 묻기로 작심합니다. 크레온 왕은 칙령을 공표한 다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모순과 새로운 경고성 발언을 계속 내뱉습니다.

 

칙령이 공표된 다음에, 테베의 노인들은 경고성의 합창을 통해서 모든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립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베에는 하나의 소문이 퍼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누군가 언덕에 방치된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알지 못하는 곳에 파묻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합창이 울려 퍼집니다. 합창은 신께서 시신의 방치를 경고한다고 노래합니다. 크레온 왕은 다음과 같이 추측합니다. 도시 내부에 반체제 세력이 이상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합창은 인간이 어느 정도로 막강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용을 부리는지를 노래합니다. (332 – 375)

 

5. 안티고네는 누군가에 의해 매장된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찾아서 다시금 양지바른 곳에 묻어줍니다. 사람들은 안티고네를 체포합니다. 사람들은 그미를 도시의 법을 어긴 범인으로 몰아서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앞에서 인간의 도덕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가족이라면 누구든 형제의 시신을 황량한 언덕에서 맹금의 밥이 되도록 수수방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께서도 인간적 도리를 이해하리라고 합니다.

 

신은 도의에 어긋난, 사악한 법을 공표한 크레온 왕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크레온 왕은 그미의 반론에 대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는 안티고네의 행동을 그저 국가의 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동 선전이라고 규정합니다. 크레온 왕이 여동생 이스메네의 범행에 대해서도 징계를 내리려고 하자, 안티고네는 완강한 자세로 동생의 무혐의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때 합창단은 테베의 랍다키덴 왕가에 내려진 저주에 관한 노래를 장엄하게 부릅니다. (582 – 625). 이로써 연극작품 「안티고네」는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