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51

서로박: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2)

6. 로시의 코뮌이 전통적 유토피아에서 수용한 사항들: 로시의 아나키즘 공동체 역시 고전적인 유토피아 패러다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로시는 노동의 향유 내지 즐겁게 일하는 유형의 노동의 가능성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에서 빌려왔습니다. 게다가 당사자가 원할 경우 두 달에 한 번씩 성의 파트너를 교체하는 사랑의 삶의 체제 역시 푸리에의 유토피아에서 이미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나아가 로시는 코뮌을 운영하는 과업에서 필수적으로 첨부되어야 할 조건으로서 과학 기술의 도입 내지 산업의 육성이라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시타델라 협동조합 그리고 브라질에서 시도된 라 세실리아 공동체는 과학 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중앙집..

34 이탈스파냐 2020.10.18

서로박: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1)

1. 로시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19세기 후반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공동체가 결성되었습니다. 공동체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드러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어진 국가로부터 직접적으로 간섭받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는 아나키즘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공동체를 결성한 사람으로서 피사 출신의 아나키스트, 지오반니 로시 (Giovanni Rossi, 1856 – 1943)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로시의 유토피아는 미리 말씀드리건대 19세기 후반의 문학 유토피아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공동체의 본질을 염두에 둔다면, 샤를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와 매우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노동의 향유의 측면에서 그리고 자치, 자활, 자생의 공동체는 ..

34 이탈스파냐 2020.10.18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7)

20. 소설 속의 세 가지 전형 (1): 공허함: 에코 소설의 현실은 14세기 이탈리아라는 배경 역시 하나의 가상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적 현실입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오늘날과 관련될 수도, 관련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가령 연쇄 살인 사건은 지어낸 이야기이며, 소수파의 종교 개혁 운동은 이른바 제반 (혁명) 운동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스토리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소설 속의 세 가지 전형을 언급할까 합니다. 이는 아마도 에코의 문학과 포스트모던 (탈 현대성) 사이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특성들입니다. 그것들은 공허함 , 무관성 (無関性) 그리고 수수방관주의로 요약되는데, 이것들은 서로의 견해를 상호 의존적으로 교묘하게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사항은 공허함을 ..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6)

16. 세 명의 등장인물 (1):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은 윌리엄 바스켈빌, 우베르틴 카잘레, 호세 부르고스입니다. 윌리엄은 프란체스코파에 속하는 영국인으로서 로저 베이컨 Roger Bacon의 과학적 사상을 답습한 관용적 자유주의자입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자석 (磁石)의 기능을 인지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안경을 직접 사용함으로써, 감추어진 사물의 진리를 추적합니다. 이러한 윌리엄의 입장은 자신의 친구, 윌리엄 오컴 William Ockham의 사상, 유명론 (唯名論)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윌리엄은 프란체스코 수사들을 “친구들”로 명명하며, 신의 절대적 자유 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베르틴 카잘레는 실존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의..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5)

14. 사랑에 관한 담론: "장미의 이름"은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주제상의 하자를 지니고 있으나, 세부적 사항에서 탁월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로 장미, 즉 사랑에 관한 담론입니다. 아드손은 소설 중반부에서 어느 여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눕니다. 비록 그미는 창녀였으나, 주인공에게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에코는 아드손이 체험했던 사랑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놀란 나머지 푸드득 날아갈 때, 가볍게 떨리는 나무 가지에서, 마구간에서 생기 있게 뛰어나오는 망아지의 눈빛에서 나는 그미의 모습을 보았다. 잘못 들어선 길을 바로잡아 주던 양떼의 울음소리에서 나는 그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로써 에코는 인간의 “충동적 본성 appetitus naturalis”을..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4)

10. 사건의 기호학: 그렇다면 어째서 에코는 수많은 인용문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삽입했을까요? 이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역사적 사실들은 진리의 파편들로서, 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방법론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소재나 기호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됩니다. 즉 진리란 인간에게는 다만 기호로서 받아들여질 뿐이고, 사물의 본질은 찾을 수 없다는 결론 말입니다. 진리와 가치에 관한 문제는 기호와 소재라는 구조주의적 관심사에 의해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코의 소설은 철학적 존재론에서 말하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사물의 표피적인 면만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3)

7. 인용인가? 표절인가? (1): 이 장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사항만을 골라, 언급해보도록 합시다. 첫째, 이 책의 제목은 아벨라르 Abaelard의 “(이곳에는) 장미가 없다 Nulla rosa est”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진리는 다만 기호로 남아있을 뿐, 그 본질은 찾을 수 없다”는 그의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소설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보다는 “장미, 그 이름과 실체”라고 명명하는 게 주제 상으로 합당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에코는 사물의 기표와 기의를 일차적으로 분리함으로써, 현상과 본질의 주종 관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서문의 내용은 기욤 드 로리 Guillaume de Lorris 그리고..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2)

4. 요한 계시록과 살인 사건 (1): 소설은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총 50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코는 (계절은 다르지만) 아마도 부활절에서 강림절 사이의 기간인 50일을 염두에 둔 것 같다. (Kamper: 434). 사건은 1327년 11월 마지막 주에 북부 이탈리아의 아페닌 언덕에 있는 부유한 클루니아첸저의 수도원에서 발생합니다. 프란체스코 교단의 승려이자 영국 출신의 학자인 윌리엄 바스켈뷜은 제자, 아드손 드 멜크와 함께 이곳으로 당도합니다. 이야기는 늙은 아드손이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윌리엄은 황제의 특별 사절로서 비밀스러운 임무를 띄고 이곳 수도원에 도착한 것입니다. 윌리엄은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소수파 사람들과 아비뇽에 머..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에코의 장미의 이름 (1)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상에는 새로운 것은 없다. .” (Francis Bacon)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은 -플라톤의 ‘재 기억 (Ανάμνησις)’처럼- 과거 사항에 의존해 있었다. 이제 새로운 지식은 미래 사항에 의해 식별되어야 한다.” (Ernst Bloch) 1. 부정적 종말론과 반 유토피아: 인용문은 그 자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재 기억 이론은 전통적 학문 연구의 바탕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과거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 행위는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과거 있었던 원초적 상을 추적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떠한 창조도, 변화된 미래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모든 새로움은 본질적으로 망각이요, 지식이란 잊힌 것들로부터 떠올..

34 이탈스파냐 2020.09.04

서로박: 도니의 '이성적인 세계' (2)

6. 『이성적인 세계 세계』사람들의 식사 그리고 의복: 모든 사람들은 근검절약을 하나의 미덕으로 여기며, 물품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는 토머스 모어의 경우와 대동소이합니다. 사람들은 점심시간에는 거대한 식당에 모여서 함께 식사합니다. 모든 물품과 음식은 사람 수에 따라 평등하게 나누어집니다. 모든 것이 공동 소유이기 때문에 재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모형의 의복을 걸칩니다. 특권을 누리는 자도 없고, 노예도 없으므로, 같은 곳의 규칙에는 어떠한 예외조항도 없습니다. 다만 나이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10년의 간격대로 다른 색의 옷을 착용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상대방의 나이를 옷 색깔로 분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곳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과 취향 등..

34 이탈스파냐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