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반도여 너와"

필자 (匹子) 2022. 2. 17. 19:57

반도여 너와

박설호

 

공부가 밥줄인 듯

술 담배를 끊고

남의 책 동초서초하며

보내는 서러운 시간들

어느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처럼

일일이식주의자가 된 나는

도둑의 설렘으로

직업소개소를 기웃거리고

괜히 태어났다며

머나먼 땅 이곳까지 와서

공부만 하는 게

부끄럽다며 세상에

무임승차한 죄의식 떨치려고

“뮌헨의 자유” 역에서 *

며칠 후에 탄생할

내 아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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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집필된 나의 미발표 작품입니다)

 

 

뮌헨의 지하철 역 "뮌헨의 자유"이다. 옛날에는 감청색이 칠해지지 않았는데, 새롭게 리모델링된 것처럼 보인다.

 

8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80년대 후반부에 한국은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돈가치는 참으로 빈약했습니다. 100만원을 환전하여 독일에서 물건을 살 경우 20만원 어치의 가치에 불과했습니다.

 

밥 한 끼 가격은 네팔에서는 30끼니를 때울 정도의 가격과 같았으니까요. 그러니 한국에서 번 돈으로 독일에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낭비였고, 독일에서 돈을 벌어 한국으로 송금하면, 그 가치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60년대 재독 간호사들이 박정희 정권 당시 실질적 도움을 준 것은 그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 뮌헨 유학생은 50명 정도 되었습니다. 유학생들은 극단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한 그룹은 부유층의 자제들이었습니다. 유학생이었지만, 집안에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유학생들의 아버지들 가운데에는 유독 장성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별을 합치면 30개가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한국만 그러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 3세계의 독재자들은 자식을 유럽으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들의 자제는 흥청망청 놀다가 학위 취득을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돈으로 학위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한 그룹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유학생 가운데에는 추운 겨울에도 흰 고무신을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분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영양실조로 인하여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가난한 유학생들이 부유한 도시, 뮌헨에 많이 모이던 까닭은 일용노동자 그리고 베이비시터 등과 같은 알바 자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엄청난 고생 후에 학위를 끝낸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는 인간 승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