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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2)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즈'

필자 (匹子) 2024. 12. 7. 09:55

(앞에서 계속됩니다.)

 

6. 의사소통의 차단 내지는 부재 현상: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변환기 속에서 겪어야 하는 변화된 사회 내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간적 실수로 빚어진 사건일 수 있습니다. 소설적 화자는 각 장마다 바뀌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알텐부르크 사람들의 의사소통의 차단 내지 부재 현상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음색은 평온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독자를 몹시 쓸쓸하게 만듭니다. 왜냐면 독일 통일은 동쪽 독일 지역의 알텐부르크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회 계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게 해주었지만, 그들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동등한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돈, 실업, 성공, 투자 등의 문제가 사람들의 관계를 서서히 갈라놓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스물아홉 개의 짤막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은 전체적으로 통독 이후의 동독 사람들의 변화된 생활에 관한 파노라마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개별 등장인물들의 상호 관계는 서로 부딪쳤다가 튕겨나가는 당구공의 움직임을 연상시킵니다. 이렇듯 작가는 통일된 독일 내의 인간관계가 고객과 고객의 일회적 만남으로 차단된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7. 작가의 추방: 슐체는 모든 이야기에 자신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표명하지 않고, 오로지 모든 것을 냉정하게 보고할 뿐입니다. 작가는 작품 내에서 직접적으로 논평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존재는 작품 내에서 마치 카메라의 역할만을 담당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평론가들은 이러한 유형의 서술 형식을 대하면서 “작가의 추방”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의도는 작품 해석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추방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학 작품을 논할 때 작가의 의도라든가 작가의 입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작품 그리고 독자의 수용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다머 Gadamer의 해석학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물음은 문학 연구의 영원한 숙제라고 여겨집니다. 과연 문학 연구의 작업에서 작가의 집필 의도는 처음부터 배제될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범위까지 배제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슐체는 1996년에 미국 뉴욕에서 약 2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데, 이때 미국 작가들의 간결한 문제, 냉담한 서술 방식을 접하고, 이에 매료된 것 같습니다. 작품 『심플 스토리즈』는 1995년의 초기작, 『행복의 서른 세 번의 순간들 33 Augenblicke des Glücks』과 함께 작가에게 문학상의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심플 스토리즈. 동독 지방에서 유래한 장편 소설』에 대한 평은 무척 엇갈렸습니다.

 

8. 헤밍웨이 소설과 유사한 서술 방식: 슐체는 이를테면 「새로운 돈」에서 헤밍웨이 스토리 식의 기술 방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플 스토리즈』의 두 번째 장에 실려 있습니다. 말하자면 헤밍웨이 단편 소설, 「미시간에서의 상승 Up in Michigan」 (1921) 가운데 이름과 장소만 변화시키고, 줄거리의 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코니 슈베르트는 제 1장 「제우스」에 나오는 인물 디터 슈베르트의 딸인데, 과거 자신이 처녀였을 때 겪었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남자가 도시로 와서 자신의 고유한 사업을 추진하다가 자신과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 다음에 말없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미는 어느 고적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꿈 많은 처녀입니다. 그는 어느 날 낯선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시골의 순진무구한 처녀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낯선 사업가에게 맡겨버립니다.

 

9. 코니 슈베르트의 사랑 이야기: 이렇게 행동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자에게서 풍기는 매력을 감내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이나, 슐체의 작품에서 시골 처녀를 눈멀게 하는 결정적인 사항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낯선 무엇이었습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코니 슈베르트에게 시골 내지는 소도시의 젊은 사내는 연인으로 전혀 적당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미는 아직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 그리고 외국을 깊이 동경하고 있었으며, 낯선 남자는 이러한 동경을 성취시켜줄 수 있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낯선 남자에게는 하룻밤 정사의 조건이 이미 충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남자는 처녀를 차가운 보트에 태웁니다. 그는 거나하게 술 취해 있으며, 처녀 역시 그를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남자가 그미를 끌어당겼는지, 아니면 처녀가 보트 위에 자발적으로 드러누웠는지 불분명합니다. 그미는 황급히 외칩니다. “안돼요, 짐. 그러지 마세요.”하고 그미는 여러 번에 걸쳐 말합니다. 그렇지만 일방적인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맡겨버립니다. 성교가 끝난 뒤에 남자는 그미의 몸 위에서 그냥 잠들어버립니다. 헤밍웨이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가운 안개가 만으로부터 서서히 퍼지다가, 숲을 지나, 그미의 감정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10. 헤밍웨이의 소설과는 다르다. 겁탈당하는 구동독 지역: 헤밍웨이는 마초 남성으로서의 이미지를 여기서 그대로 표출시키고 있습니다. 여성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그러하듯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욕정의 객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슐체는 서술의 관점을 변화시켜서 모든 것을 처녀의 시각에서 고찰하고 처녀의 입으로 서술하게 하였습니다. 슐체의 이야기에서 마지막 문장들은 거의 결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는 어느 무책임한 사내로부터 버림 받은 처녀의 실망감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처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경험을 쌓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슐체는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동쪽 독일이 서쪽 독일과 경제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조우하는 행위에 대한 상징으로 말입니다.

 

처녀는 그미 부모의 논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내가 순진하고 어수룩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모든 게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었다고요. 그건 옳으신 말씀이지요.”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처녀에게 중요한 것은 뤼베크에서 그리고 영국 여객선에서 일자리를 얻는 일이었을 뿐, 사내와의 동침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코니 슈베르트는 그 자체 동쪽 독일 지역을 상징하는, 의인화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일견 서독 남자가 동독 여자를 겁탈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동독의 경제가 서독의 경제에 집어삼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