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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박: (3) 잉고 슐체의 '새로운 삶들'

필자 (匹子) 2024. 11. 23. 09:31

(앞에서 이여집니다.)

 

과거 작가 지망생으로 살아가던 당시에는 최소한 입신 (立身)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서방세계는 그에게 흐릿한 천국으로 인지되곤 하였습니다. 주위에서 그는 선배 작가들이 서독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를 접하고, 이를 기대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일이 되자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성공은 창작 대신 경제적 이득 추구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엔리코 튀르머는 성공의 가도를 달립니다. 그렇지만 그는 깊은 심리적 좌절감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어떤 순수한 꿈이 자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클레멘스 폰 바리스타에게 자신의 꿈을 팔아넘기고, 대신에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상술을 얻었던 것입니다.

 

서방세계는 주인공에게는 비록 접근이 금지된 세상이었지만, 마치 천국과 같은 저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방세계가 동쪽 독일인들에게 개방되었을 때, 서방세계는 천국의 기능을 상실하고 맙니다. 서방세계의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은 저세상의 천국이 아니라, 일상이 되고만 것입니다. 주인공은 다음의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합니다. 천국은 항상 나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는 다른 미지의 공간에 설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2008년에 간행된, 술체의 소설 아담과 에벌린 Adam und Evelyn에서, 그리고 2017년 소설 페터 홀츠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향: 잉고 슐체의 소설 페터 홀츠에 대한 돈의 담론, in: 독일 문학, 59권 1호, 2018, 103 - 133.)

 

친애하는 S, 소설의 내용이 어떠했는지요? 잉고 슐체의 소설은 결코 하나의 새로운 삶을 기약해주지는 않습니다. 소설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새로운 시대에 대안적 삶이라든가 다원주의의 생활방식을 설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작품의 제목을 주의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목은 새로운 삶이 아니라, 복수형인 새로운 삶들입니다. 원래 새로운 삶 Neues Leben1946소련 점령지역 SBZ”에서 탄생한, 자유 독일 청년을 위한 출판사 이름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과거 전쟁의 상흔과 죄의식을 떨치고 찬란한 사회주의의 미래를 갈구하자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항을 암시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즉 독일인의 미래 삶은 하나의 특정한 범례로 집약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다양한 패턴으로 출현하게 되리라는 사항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나간 구동독에서의 삶이 이른바 사회주의의 실천이라는 한 가지 유효한 범례에 따라 이행되었다면, 전환기 이후의 삶은 얼마든지 어떤 다양한 양상, 즉 세계 시민으로서의 관점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다원주의의 특성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과거 구동독에서 사람들이 주인공을 하인리히 튀르머로 불렀다면 (누나인 베라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자신의 이름이 하인리히로 적혀 있습니다.), 전환기 이후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하인리히의 이탈리아 식 이름, “엔리코로 불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와 같습니다.

 

슐체의 소설은 한편으로는 독일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의 삶의 변전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당시 에 더 나은 삶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바람을 무산시키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Rien ne va plus.” - 이것이 바로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적 발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을 접하는 독자는 어째서 어떤 묘한 허전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요? 잉고 슐체의 주인공엔리코 튀르머의 세계관은 넓은 의미에서 토마스 브루시히의 그것과 차이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거대한 꿈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체념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념은 때로는 농담으로 드러나고, 때로는 풍자와 아이러니로 표현됩니다. 때로는 과거 삶에 대한 향수로 묘사되곤 합니다. 어쨌든 통일된 독일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삶의 패턴이 속출하였습니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일, 세계 속의 개방된 삶, 다문화 사회 내의 평화공존, 네오 나치의 등장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무척 다양한 것이었으므로, 심지어 오시들 Ossis와 베시들 Wessis 사이의 오해 내지는 불신조차도 하나의 상투적 편견으로 다가올 정도입니다.

 

다양한 삶의 제반 양상들은 제2의 미국으로서의 독일의 모습을 보여줄 정도입니다. 슐체의 소설은 바로 이 점을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영역 역시 시장의 자유, 작가의 자유 그리고 독자의 자유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맛이 과연 달콤한 것일까요? 행여나 거기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둔중한 책임 의식이 없고, 그저 개인주의의 사적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박한 무사안일주의만이 도사리고 있을까요? 혹자는 두터운 장편 소설이 마치 황금 만능시대의 팔려나가는 단물 빠진 아이스크림과 같은 삶을 담아내고 있다고 비아냥거립니다. 어쨌든 다음의 사실은 확실합니다. 즉 작품이 전환기 이후의 독일의 현실과 동시대인들의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사실 말입니다.

 

(끝 감사합니다.)

 

출전: 박설호: 실패가 우리를 가르친다. 통일 전후의 독일 소설 연구, 열린책들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