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정치란 어떤 정부든 간에 법의 집행이라는 미명 하에 법을 만들고, 파괴하며, 부수고, 판결하며, 무고한 인간들을 방해하고 그들의 자유를 중지시키거나, 때로는 면책을 보장함으로써 그 법들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게 할 수 있는 무엇이다.” (Vittorio Alfieri: Della tirannide)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235년 전에 이탈리아의 극작가, 비토리오 알피에리가 남긴 말입니다. 현재 이 글을 읽으면 우리의 뇌리에는 두 가지 사항이 당장 연상될 것입니다. 그 하나는 현재의 윤석열 정권의 무도한 폭정이며, 다른 하나는 역사의 무심함일 것입니다. 알피에리의 생애 이후에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역사와 민주주의는 발전되지 못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게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친애하는 A, 당신을 위해서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알피에리의 작품을 소개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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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알피에리(Vittorio Alfieri, 1749 ~ 1803)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이탈리아 근세 최대의 비극 작가이기도 합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주, 소읍 아스티의 백작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토리노의 귀족학교에서 수학한 후 5년간 유럽 각지를 편력하며 연애 사건을 일으키는 등 갖가지 기행을 일삼은 다음에 문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돌아온 후에는 쉬지 않고 각지를 도는 한편, 문학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비극은 도합 19편이 됩니다. 이 가운데에는 무도한 폭군, 에스파냐 왕 필리포와 그의 아들과의 권력 투쟁을 다룬 「필리포」,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오레스테스」, 부친을 남몰래 연모하다 종국에는 자살하는 여인을 그린 「미라」, 성서에서 힌트를 얻은 「사울」 등이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알피에리는 무엇보다도 자유의 외침 그리고 폭정에 대한 처절한 증오심을 작품 속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유럽 전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극작가였습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 「비르지니아」는 1777년에서 1783년 사이에 집필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치에서의 모반La congiura de’ Pazzi」 (1777), 「티모레오네Timoleone」 (1779)와 함께 알피에리의 “자유의 삼부작”으로 손꼽힙니다. 추측하건대 알피에리는 독일의 극작가, 곳홀트 E.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Emilia Galotti」 (1772)의 놀라운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것 같습니다. 정의로운 사내는 폭군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서 폭군이 노리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칼로 찔러 죽입니다. 문제는 독재자가 일반 대중의 사적인 삶에 관여하여, 그들의 행복을 모조리 빼앗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역사 서적에 근거합니다. 당시에 알피에리는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에 머물면서, 이에 관한 문헌을 직접 구해서 읽었으며, 「폭정에 관하여Della tirannide」 (1777)라는 정치적 문헌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레싱은 검열을 의식하면서, 작품 「에밀리아 갈로티」의 배경을 고대의 어느 이탈리아 지역으로 이전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알피에리의 작품의 배경을 이탈리아 로마 그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작품은 관객에게 어떤 현장성의 강도를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작품에 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르지니아는 로마의 위대한 군인, 비르지니오와 누미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처녀입니다. 그미는 호민관 이칠리오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이탈리아를 다스리는 10인 위원회 (디셈비리)에 속해 있는 권력자, 아피오 클라우디오는 우연한 기회에 비르지니아를 바라보며 황홀해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차지하겠다고 작심합니다. 아피오는 변호사, 마르코를 고용하여, 계략을 꾸밉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비르지니아가 누미토리아의 딸로 태어난 게 아니라, 노예의 자식이라는 이간책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마르코는 서류를 날조하여, 사실을 왜곡하려 합니다. 이러한 간계를 접한 호민관, 이칠리오는 몹시 분개합니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거짓된 날조에 거칠게 항의합니다. 그러나 아피오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이때 비르지니아는 다음과 같이 결심합니다. 즉 더럽고 교활한 독재자의 노리개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고 말입니다.
막이 오르면 주인공 모녀는 늠름한 호민관, 이칠리오의 성품을 칭찬합니다. 이때 마르코가 찾아와서, 권력자, 아피오 클라우디오의 명령서를 낭독합니다. 즉 비르지니아와 누미토리아는 더 이상 모녀 관계가 아니며, 이 시간부터 접근 금지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르코는 두 사람의 묘한 관계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는 기괴한 말을 남긴 뒤에 그곳을 떠납니다. 뒤이어 이칠리오가 두 사람 앞에 나타나, 흥분한 채 독재자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고 일갈합니다. 그렇지만 비르지니아를 둘러싼 계략과 중상모략은 법정에서 분명히 가려지리라고 합니다. 이때 비르지니아는 어머니와 약혼남에게 다음과 같이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피오 클라우디오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을 소유하기 위해서 권력자가 간교한 술책을 활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2막에서 재판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마르코는 법정에서 비르지니아가 노예 신분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제출합니다. 이칠리오는 이 과정에서 모든 게 거짓된 조작이며, 비르지니아에 대한 음해공작이라고 선언합니다. 법정 밖에서 데모대의 고함이 굉음으로 울려 퍼집니다. 로마 시민들은 폭정을 일삼는 "디셈비리"에 완강하게 저항하려고 합니다. 아피오는민중들의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재판의 결정을 유예하는 데 동의합니다. 이로써 비르지니아는 자유의 몸으로 풀려납니다. 그렇지만 아피오는 몰래 측근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즉 비르지니아의 아버지가 절대로 로마에 당도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비르지니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태의 내막을 접하고 민중의 거사 계획에 관해서 전해 듣게 됩니다. 비르지니오는 호민관, 이칠리오와 함께 자신의 군대 그리고 데모하는 민중을 이끌면서, 아피오 클라우디오의 폭정에 무력으로 저항하려 합니다. 비르지니아 역시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천명합니다.
제4막에서 아피오는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비르지니오와 일대일로 만납니다. 이때 그는 호민관과 장성을 서로 이간질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즉 이칠리오는 로마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며, 자신이야말로 비르지니아의 진정한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피오는 한편으로는 애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장성을 협박합니다. 만약 비르지니아가 호민관과 결혼하게 되면, 그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뒤이어 아피오는 비르지니아와 독대합니다. 그의 협박은 계속 이어집니다. 만약 두 사람의 약혼이 파기되지 않으면, 아피오는 그미의 아버지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때 비르지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그미는 권력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호민관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내심 잔인무도한 권력자의 여인이 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습니다. 어쨌든 아피오의 협박은 부자유에 저항하려는 그미의 용기 있는 자세를 꺾어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제5막에서 비르지니오와 아칠리오는 마지막 거사를 치릅니다. 아칠리오는 무력 봉기에 가담하면서 싸우다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맙니다. 이때 비르지니아의 어머니, 누미토리아가 나타나는데, 거리에는 수많은 로마인이 운집해 있습니다. 호민관, 아칠리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이 퍼집니다. 그런데 비르지니오의 “계속 돌격하여 싸우자.”라는 열정적인 호소에도 불구하고, 데모하는 대중들은 더 이상 무장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습니다. 이때 비르지니오는 자신의 딸을 사악하고 교활한 폭군에게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딸과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포옹합니다. 이때 그의 단도는 딸의 옆구리를 찌르게 되자, 비르지니아는 결국 피를 흘리면서 사망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아버지가 딸을 죽이는 모습에 격분하여,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여 독재자를 권좌에서 쫓아냅니다.
알피에리는 자신의 연극 작품에 카다란 애착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극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조건 우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작가는 자유의 이상 그리고 억압이라는 구속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관객들은 단순하게 구분된 흑백 논리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비르지니아, 누미토리아, 비르지니오 그리고 이칠리오는 미덕을 강조하는 고전적 이상을 품고 있었다면, 마르코 그리고 아피오는 권력과 이권을 참하는 사악한 패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작품은 개인의 숙명에 저항하면서, 자유를 지켜내려는 힘없는 약자들의 놀라운 저항적 범례를 여지없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비르지니아의 비극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부하게 다가오는 이아기일지 모릅니다. 왜냐면 왕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아버지가 친딸을 칼로 찌르는 사건은 별반 설득력을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세기 유럽 귀족과 평민 사이의 철저한 신분 질서 그리고 절대 왕정의 극한적 폭력을 이해해야만, 사건을 둘러싼 문제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 시대를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사건의 리얼리티를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자식의 출산은 무엇보다도 나라의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장애아가 태어나면, 토론을 벌인 다음에 어느 언덕에 던져 죽이곤 하였습니다. 나라가 몰락하여 모든 사람이 몰살당하는 것보다 사회에 짐으로 작용할 장애아 한 명을 미리 죽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 딸을 칼로 찌르는 끔찍한 행위는 상기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알피에리는 당시에 정치적으로 와해하고 분할된 이탈리아가 왕전 체제를 떨치고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 돌아가기를 애타게 갈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는 프랑스 혁명 그리고 앙시앵레짐을 완전히 극복할 만큼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이룩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알피에리의 사고는 시대를 넘어서는 진취적 민주주의의 혁명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르지니아」가 자유와 애국심을 고취하는 근대 사회의 우의극으로 평가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등장인물의 고통스러운 삶은 전근대적인 봉건적 현실을 떠나거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알피에리의 인물들은 억압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온갖 술수와 박해를 떨치고 용맹한 결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알피에리가 추구한 자유의 정신이 유럽 전역의 진부하고 낙후한 정치 경제적 풍토를 변화하게 하고, 보다 더 평등한 인간 삶의 방책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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