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K, 서양의 연극사에서 장 밥티스트 몰리에르 (Jean-Baptiste Molière, 1622 - 1673)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희극 역시 비극만큼 놀라운 수준을 지닐 수 있음을 분명하게 입증한 극작가가 바로 몰리에르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희극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러디와 풍자인데, 몰리에르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동원하여 당시 사회의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의 허장성세, 표리부동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대비판은 과히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몰리에르 의 희극 작품 「인간 혐오자 Le Misanthrope」를 다루는 것은 그 자체 의미를 지닐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5막으로 이루어진 희극으로서 1666년에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오늘날 몰리에르의 다른 극작품「타르튀페」 그리고 「동 쥐앙」과 함께 몰리에르 성격희극의 삼대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몰리에르 (1622- 1673)
자고로 명작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합니다. 극작품 「인간 혐오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몰리에르는 이 작품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몇몇 전문가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작품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의 평론가 니콜라스 보알로-데스프레오 (Nicolas Boileau-Despréaux, 1636 - 1711)는 몰리에르의 작품이 먼 훗날 명작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인간 혐오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잘 알려진 소재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작품의 특성상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이 없는 관계로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인간 혐오자」는 17세기의 프랑스 고전주의의 자유 운율을 도입하여 여러 다른 상황 속에서 다양한 표현을 채택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몰리에르는 대체로 희극 작품에서 사용되곤 하는 간계라든가 변장, 우연과 과장 등의 요소를 처음부터 배제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관계를 고조시키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친애하는 K, 어째서 인간의 의식은 마치 주인에게 꼬리치고, 타인에게 컹컹 소리 지르는 개와 같은 어떤 보수적 습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처음부터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식은 때로는 이러한 아집과 편견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로슈푸코 La Rochefoucauld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르는군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기억력이 나쁘다고 한탄하지만, 자신의 판단력이 나쁘다고 한탄하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인간 동물은 라로슈푸코에 의하면 스스로 올바르고 올바르게 생각한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아집에 차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의식은 때로는 아집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합니다. 시쳇말로 똥고집을 피우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못난 인간군이 바로 교수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 가지 사항만 더 추가해 보기로 하지요. 의식의 보수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시민들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주지하다시피 유죄 판결을 받고 독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박원순: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한겨레 신문사 1999년, 29페이지 이하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논거가 있지만 그가 독배를 들어야 한 것은 그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명제는 “아집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야 말로 진정한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양약 良薬은 고어구 苦於口라고, “너는 무식하다.”라는 진리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가만히 놔둘 리 만무하지요. 이와는 다른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아돌프 히틀러는 “너 독일인은 위대하다.”고 일갈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가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안 그래도 돈과 여자를 먼저 차지하는 유대인들이 미워죽을 지경이었는데, 히틀러의 말은 가슴속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독일인들은 마치 피리소리에 신들린 쥐떼처럼 전쟁에 참여하여 죽어갔습니다.
이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알세스트는 스스로 귀족이지만 완고할 정도로 귀족 사회의 표리부동함에 대해서 꼬장꼬장 따집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주위 사람들과 타협할 줄 모릅니다. 그의 친구 필랭트는 제발 온건한 태도로 다른 사람과 타협하라고 조언하지만, 주인공은 이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이 서로 아첨을 떨면서 상부상조하는 태도는 그의 눈에는 항상 위선으로 비칩니다. 그렇지만 가급적이면 강직하게 살려고 애쓰기 때문에 주인공은 언제나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갈등의 한 복판에는 셀리멘이라는 21세의 아름다운 과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미는 남편을 잃은 뒤부터 살롱을 운영하고 있는데, 수많은 남자들이 그미에게 찾아와서 추파를 던집니다. 그렇지만 셀리멘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고, 연애 유희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오롱테라는 귀족은 셀리멘을 위해서 소네트 한편을 집필하여 살롱에서 낭독합니다. 주위의 어느 누구도 오롱테를 만만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궁에 들락거리면서 황제와 알현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터였습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오롱테의 작품을 형편없는 졸작으로 매도합니다. 문제는 오롱테가 이로 인하여 살롱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웃음꺼리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는 적개심을 느끼면서, 주인공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롱테는 어느 날 주인공을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고소합니다. 이때 필랭트는 판사를 돈으로 매수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조언하지만, 주인공은 친구의 조언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재판에서 패소하고 맙니다.
셀리멘과 아르지오네 2003년 독일 연극제
알세스트는 사랑의 삶에서 더욱 참담한 패배를 맛봅니다. 그는 셀리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그미는 카르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셀리멘은 뭍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정작 한 남자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아르지오네는 알세스트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멍청하게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르지오네는 셀리멘의 친구로서 그다지 매력 없는 나이든 여성입니다.
그미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셀리멘의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편지 한통을 공개합니다. 편지에는 셀리멘이 남자들에게 미소를 짓지만, 속으로는 모조리 경멸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혀를 내두르며 살롱을 떠나지만, 주인공만큼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자고 셀리멘에게 제안합니다. 이때 그미는 어느 성에 고립되어 재미없는 인간과 따분하게 사느니, 차라리 살롱에 머물면서 멋지고 젊은 사내들과 희희낙락거리며 살아가는 게 더욱 흥겹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미는 자신의 결정을 계속 미룹니다.
작품은 한편으로는 경박하고도 위선적인 사교계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어진 세계와 인간을 무작정 경멸하는 상류층 인간형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습니다. 알세스트는 인간을 혐오하고 세계를 혐오합니다.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이른바 시토이앙과 같은 강직한 양심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오만한 허영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극작가 몰리에르는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바로 이러한 인간적 결함을 예리하게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작품 속에 알세스트와 셀리멘의 애정관계와 반대되는 경우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친구 필랭트는 분별력을 지닌 시토이앙의 전형입니다. 주인공이 더 이상 셀리멘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필랭트는 셀리멘의 사촌 누이인 엘리앙트로부터 구혼을 허락받게 됩니다. 엥리앙트는 남자들에게 교태를 부리는 사촌 언니와는 달리 언행이 신중하고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여성입니다.
친애하는 K, 알세스트는 17세기 프랑스 귀족의 모순된 성격을 그대로 답습한 인물입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가령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인 셀리멘을 이른바 미덕이라는 길로 안내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그는 주어진 세계로부터 도피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뇌까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알세스트는 마치 마조히스트처럼 재판의 패배를 마냥 즐기고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그의 태도는 어떤 피학적인 도피주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의 인성 속에 도사린 어떤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령 알세스트가 하필이면 자신이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모든 특성을 지닌 여성, 셀리멘을 사랑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마지막으로「인간 혐오자」의 수용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주인공의 모순적인 특성만큼이나 모순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몰리에르의 동시대 사람들은 모두에서 언급했듯이 작품의 우스꽝스러운 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에, 현대의 비평가들은 대체로 알세스트의 일관적인 행동에 찬사를 보내곤 합니다. 그런데 작품은 근세의 시대에는 약간 다르게 이해되었습니다. 예컨대 장 작 루소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즉 몰리에르는 유일하게 미덕을 지닌 주인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스스로 부패한 프랑스 귀족 사회에 순응하는 우를 범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즉 주인공 알세스트와 프랑스 사회가 서로 갈등을 빚은 것 자체가 비극적이라고 말입니다. 낭만주의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은 작품 속에 내재한 모순점을 처음으로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나, 작품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알세스트라는 인간형 속에 내재한 비극적이며 모순적인 특성을 예의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몰리에르의 「인간 혐오자」는 이경의 교수의 번역으로 지만지 고전 선집 319 권으로 2008년에 간행되었습니다.
'32 근대불문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2)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0) | 2024.10.12 |
---|---|
서로박: (1)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0) | 2024.10.12 |
서로박: (3) 생시몽의 중앙집권의 유토피아 (0) | 2024.02.02 |
서로박: (3) 생시몽의 중앙집권의 유토피아 (0) | 2024.01.31 |
서로박: (3) 생시몽의 중앙집권의 유토피아 (0) | 2024.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