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2) 플라톤의 국가

필자 (匹子) 2024. 9. 5. 10:58

(앞에서 계속됩니다.)

 

7.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세 가지 계층: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 그리고 아다이만토스 사이의 대화는 제 3권에서 계속됩니다. 이들의 대화는 계층 국가내의 국가관을 위한 “교육paideia”의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세 가지 계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농부와 “수공업자Δεμιυργοι”의 계급, “파수꾼Φλακες”의 계급 그리고 “지배자Αρχοντες”의 계급입니다. 지배자의 수가 적은 반면에 농부와 수공업자들의 수는 많으며, 공동체를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생업에 종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행복감과 관련하여 이들의 개별적인 삶에 관해서 세부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로 플라톤은 자신의 출신 성분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고려할 때 처음부터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 그다지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세 가지 계층으로 축조된 이상 국가가 건설되면, 하층 계급 역시 자동적으로 행복한 삶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고 막연히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층계급 역시 특정한 범위에 한해서 교육받아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8. 황금의 시대의 찬란한 삶의 부정: 소크라테스는 천민들이 애타게 갈구하는 천민 국가의 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글라우콘의 견해에 의하면 극기주의자들의 국가는 욕망을 억제하는 삶의 방식 때문에 결코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미식가들의 향락적인 태도에 관해서 맹렬하게 비난을 가합니다. “우리는 그림이나 황금 그리고 상아와 같은 것을 얻으려고 애써야 하네. (...)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냥꾼들, 모방 예술가들, 시인들과 하인들, 음유 시인들과 극작가들, 무용수들, 연극 제작자들,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들의 치장을 담당하는 예술가들이 이에 가담해야 하네.”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고매한 지식을 쌓는 데 유리하다는 점에서 황금의 시대를 막연히 하나의 고상한 현실로 수용했을 뿐입니다. 소크라테스 역시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자연적 카니발, 인공적이며 풍요로운 축제 등을 전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냉정한 질서, 완전히 통제된 세상 그리고 불변하는 나라의 이성적인 국가의 상밖에 없습니다. (블로흐: 985).

 

9. 군인들을 위한 교육, 음악과 체조: 플라톤은 이상 국가 내에서의 교육과 관련하여 중간 계급인 파수꾼들에 대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언급합니다. 파수꾼들, 다시 말해서 군인들은 플라톤에 의하면 용맹심과 분별력을 지녀야 할뿐 아니라, 나름대로의 철학적 식견도 지녀야 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음악을 첫 번째 중요한 과목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두 번째 중요한 과목으로서 플라톤은 육체를 강건하게 하는 체조 훈련을 제시합니다. 피교육자들은 음악과 병행하여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문학 교육에 있어서 한 가지 제한 사항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저자는 호메로스의 신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로 (국가내의 인민들을 교육시키는 재료로)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에 관한 이야기, 즉 신화들은 -인간에 의해 근접되기 어렵기 때문에- 결코 교육을 위한 소재로 채택될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는 군인은 신화의 나쁜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몇몇 군인들은 경박한 사고를 본받고, 기강이 해이해진 채 신들의 장난기 내지 어떤 제어할 수 없는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므로, 군인 본연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군사정책을 총괄하는 자는 군인들 가운데에서만 배출될 수 있다고 합니다. 파수꾼, 즉 군인 계급은 재물, 거주지 등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식사합니다.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을 탐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처신하는 것을 하나의 명예로 여깁니다.

 

10. 세 가지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덕목: 네 번째 권에서 플라톤은 제각기 계층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덕목을 언급합니다. 지배자는 무엇보다도 지혜를, 파수꾼 (군인)은 용감성을, 수공업자는 사려 깊은 척도를 고수해야 합니다. 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의로운 품성을 지녀야 하는데, 오로지 이들이 정의로움을 지녀야만 계층 간의 결속이 굳건하게 다져지게 됩니다. 이를 따라서 정의로움을 위해서는 지배자는 “이성λογίστίκον” 내지는 철학적인 사고를, 파수꾼 (군인)은 “용기θυμοειδες”를, 수공업자는 “충동성επίθυμήκον”을 제각기 고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심성을 인간의 신체 내지 인종으로 비유합니다. 지배자는 신체의 머리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는 지혜를 사랑하는 그리스인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파수꾼 내지 군인은 신체의 몸통 부위에 비유될 수 있는데, 이는 남부 유럽 인종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농부 내지 수공업자들은 신체의 사지에 비유될 수 있는데, 이는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북구 인종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어쨌든 정의로움은 국가의 조화로운 일원성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조화로운 일원성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합심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의로움을 실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 된다고 합니다.

 

11. 사유재산 철폐와 국가의 방어: 다섯 번째 권은 (아주 현대적으로 들리는) 특성에 관한 국가 철학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파수꾼 (군인) 계급에 해당되는 사항으로서 두 가지 강령을 내세웁니다. 그 하나는 사유 재산 철폐이며, 다른 하나는 남녀의 동등한 권한입니다. 이는 당시의 도시국가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히 혁명적 발상을 지니고 있으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끼친 혁명적 영향력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특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놀랍게도 여성과 아이들이 공동체에 속하게 될 때까지 공동으로 교육시킵니다. 플라톤은 오로지 가족들만의 끈끈한 결속감은 국가 체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남자들이 출정하거나, 전선으로 떠날 때 파수꾼 계급의 여자들은 도시를 방어할 의무를 지닙니다. 이 경우 그들은 남자들이 행하던 모든 유형의 군사적 방어에 투입됩니다.

 

12. 파수꾼은 경제력을 지녀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파수꾼 (군인)은 어떠한 경제력도 지니지 않으며, 부를 탐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파수꾼들은 어떠한 사유물도 소유할 수 없으며, 금과 은을 사유물로 취해서도 안 됩니다. 플라톤은 파수꾼들이 물품을 어떻게 지불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파수꾼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사람들과 노예들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무상으로 얻는 게 분명합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든 경제력을 쥐고 있지만, 결코 정치적인 힘을 장악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가 언제나 전쟁의 상태에 처해 있으므로, 수공업자들은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파수꾼들에게 제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파수꾼들은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 헌신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 파수꾼들은 신의 권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파수꾼들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국가의 상태가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 처해 있다면, 국가가 어떻게 바람직한 이상 국가로 설계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우리는 외부의 적과 싸우는 전쟁만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기에 발생할 수 있는 내부의 폭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수꾼들은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신의 권능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13. 가족 제도의 폐지와 사랑: 가족제도의 폐지는 파수꾼 계급 그리고 지배자 계급에만 해당하는 제도입니다. 농부와 수공업자 계급은 가급적이면 일부일처의 관습을 준수하면서 생활합니다. 남녀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공동의 삶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은 남녀 관계의 사랑보다는 동성애의 사랑을 더욱 숭고한 것으로 용인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성의 열정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명상적이고 음악적인 동류의식과 관련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간통이 커다란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일부일처제의 결혼 제도가 없으므로, 혼외정사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장년의 남자들은 젊은 미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국가의 뜻에 따라 짝을 찾고, 어떻게 해서든 자식을 늘여나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조(貞操)와 혈연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개개인이 봉사하는 행위였습니다. 가족제도의 폐지는 먼 훗날 캄파넬라와 푸리에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에 의해서 시민적 가족 제도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계승됩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