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B. 슈미트의 '고향의 저편에서'

필자 (匹子) 2024. 4. 3. 09:57

다음의 글은 블로흐의 제자, 부르크하르트의 책, "고향의 저편에서. 파괴성 속에 주도적으로 자리한, 유토피아에 적대적인 입장에 반대하면서 Am Jenseits zu Heimat. Gegen die herrschende Utopiefeindlichkeit im Dekonstruktiven." (1994)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오늘날의 유토피아의 사고가 어떠한 기능을 지니는지, 그리고 현대의 디지털 기술 메커니즘의 사회에서 유토피아가 과연 어떠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첫 번째 책은 1988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다른 글을 통해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여기서는 두 번째 문헌만을 고려하기로 한다.

 

 

『고향의 저편에서』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의 유토피아의 적대적 현상을 지적하고, 디지털 기술 메커니즘의 사회에서 유토피아의 사고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정보 사회는 유토피아의 사고에 대해 적대적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슈미트에 의하면 배격되어야 할 죄악과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디지털 정보 사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잘못된 발전을 거듭해 왔는지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드물다.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정보의 홍수는 새로운 기술로 전파되는 모든 자료를 서로 비교하여, 고유한 가치를 논하기 어렵게 만든다. 수없이 쏟아지는 자료들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다. 이로 인하여 출현하는 것은 비판 의식의 종말, 유토피아 사고의 종말의 현상이다.

 

주어진 현실은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들로 인하여 혼란의 상태 속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독재자의 의도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 자체를 유동하지 못하게 하고 마치 암석처럼 굳어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로 인하여 정보 사회 내의 제반 지식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사장되지 않을 경우 개별 인간이 필요로 하는 지엽적 욕구만을 충족시킬 뿐이다.

 

슈미트는 현대의 디지털 정보산업의 시대를 “다소 안정적인 토피아의 시대”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토피아”란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용어로서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경향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토피아 Topie”란 사회의 전환과 변혁이 차단되어 있는 시대적 현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안정의 시기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착된 변화 없는 현재 상태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정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슈미트의 견해에 의하면 유토피아의 갈망이 외면당하는 현상에 대해 체념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문제는 디지털 시대에 수많은 정보들을 공유함으로써 주체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배제되는 구조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문제시되는 것은 정보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 체계 자체가 아니라, 수많은 정보의 홍수가 인간 주체의 결국 성찰을 마비시키고, 비판의식을 둔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은 수많은 정보의 바깥 영역에 위치하는 잠재적 비판의 공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슈미트는 사이버 세계의 소통의 기술 속에 도사린 이러한 모순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보 사회 내에서 일견 원활하게 수행되는 인간의 소통 행위에 대항하여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보 사회는 얼핏 보기에는 모든 억압 내지 지배구조를 빠져나와서, 굳건한 토대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더 나은 사회적 삶의 효모 내지 촉매제로 작용하는 유토피아는 사멸되지 않고, 다소 안정적인 토피의 시대의 지하에서 여전히 생동하고 있다.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슈미트의 견해에 의하면 첨단 기술의 소통 시스템의 조건 속에서 유토피아의 잠재성을 찾아내야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슈미트는 유토피아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부정하는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서 오히려 역으로 어떤 체제파괴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지식인은 다소 안정적인 토피아의 시대에 어떤 비판 의식을 제시함으로써 제각기 나름대로 유토피아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의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이 유토피아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슈미트는 이들의 관점 속에 이미 유토피아의 사고가 은폐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삶의 영역의 우주적 확장에 즈음하여 선사시대에 생동하던 구조의 구체성을 다시 획득하려고 했다.

 

2. 롤랑 바르트는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비판적 충동을 도출해냄으로써 어떤 유토피아의 요소를 찾으려고 했다. 3. 알튀세르는 사회 내의 계급 투쟁에 더 큰 비중을 두기 위하여 인간의 구조적 객관적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어떤 학문적 구상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급투쟁은 알튀세르에 의하면 어떤 개방된 출구와 함께 혁명적 사건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4. 미셸 푸코는 모든 보편화된 역사 이론을 배격하고, 이에 반대되는 요구 사항에 대해 독점적으로 거부하는 전체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푸코의 이러한 태도에서 묘하게도 유토피아의 기능이 엿보이고 있다. 5. 리요타르 반-조직적이며, 반-발전논리적인 유토피아를 표방하고 있다. 만약 체제를 위해 축적된 모든 정보들을 과감하게 차단시킬 수 있다면, 유토피아의 사고는 얼마든지 비판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6. 장 보드리야르의 사고는 비-국가주의의 자유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뮬레이션은 유토피아의 가상적 상 속에서 자유롭게 변화하는 부호의 혁명적 기호학으로 머물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푸코와 리요따르가 주장하는) 주어진 시스템에 대한 반 시스템적 대립과는 달리, 사고의 분산과 해체를 강조한다. 갈망의 기계들은 거대한 사회 기술적 시스템에 대한 충동을 약화시킴으로써 어떤 해방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최소한의 유토피아는 사회정치적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정보 기술 내지 소통의 기술로 정착된 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출구를 스스로 차단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과 반대되는 공공연한 사회 이론 역시 자기 기만으로 이해될 뿐이다.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마력적인 변증법으로써 첨단 기술 집약적인 서구 산업 국가의 현실을 포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슈미트는 대안으로서의 반대 세계를 일회적으로 구상하느니, 차라리 역설적으로 변화를 자극하는 유토피아의 에너지를 축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의 유토피아를 염두에 둘 때, 어떤 계획Planung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적 계획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책과 병행하여 실천될 것이므로, 결국 유토피아의 사고를 기회주의의 나락 속에 갇히게 할지 모른다.

 

미래의 유토피아는 슈미트에 의하면 중앙집권적 계획과는 무관하게 다원주의의 개별적 구상 속에 정착될 것이다. 미래의 유토피아는 이를테면 농업 중심의 코뮌 운동, 원자력 발전에 대항하는 독특한 저항 조직의 운동, 자치적인 대안의 삶을 위한 미적 디자인 등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