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물질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인간 정신의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철학자들은 제각기 물질의 이러한 고립 상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인식론적인 근거를 마련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질에 대한 이해가 물질의 고유한 가치만큼 오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물질을 오랫동안 관념 이론 속에 가두어 놓은 채 주체에 대립하는 무엇 내지는 객체 등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자연과 세계는 객체요, 인간은 주체라는 사항은 이러한 관념 이론을 강화하게 했습니다.
물질은 관념 이론에 의해 나중에는 인간 정신과는 완전히 차단된 무엇으로 파악되기도 했습니다. 관념 이론에 의하면 물질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고립된 무엇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관점과 대립하는 무엇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유동하는 세계는 폐쇄적으로 고립되고, 스스로 움직이는 물질은 마치 정지 상태에 머무는 고체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기계적 물질 이론가들과 노동자의 운동을 연구하는 정치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물질은 마치 인간 정신의 운동처럼 유동하면서 꿈틀거리는 무엇입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블로흐는 인간의 정신을 물질과 대립하는 무엇으로 파악하지 않습니다. 존재와 의식은 전체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물질 속에 속해 있는 무엇으로서, 내부적으로 제각기 자그마한 차이점을 드러낼 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물질이 양적으로 변화되지만, 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동등한 소재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블로흐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어떤 아직 아닌 무엇ein Nocht-Nicht“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자신의 가능한 형태를 여전히 각인하지 못하고 있는 무엇입니다. 물질은 자신의 과업을 아직 완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작업을 수행 중이며, 질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블로흐의 물질 개념 속에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관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블로흐는 자신의 물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의 대리석을 하나의 비유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는 존 로크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와 유사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언젠가 존 로크는 인간의 내면에는 어떠한 선천적인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른 인물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의 형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근육 위로 불끈 튀어나온 동맥일 것이다. 만약 대리석이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면, 헤라클레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선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예술적 신체에서 동맥을 발견해내는 일이 뒤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Gottfried Wilhelm Leibniz: Neue Abhandlungen über den menschlichen Verstand, 1765, Hamburg 1971, S. 8.)
인용문에서 라이프니츠는 존재의 내부에 가능성의 모든 방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헤라클레스의 비유로써 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논리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주어 속에는 모든 가능한 술어가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어 속에 이미 술어가 있다 praedicatum inest subiecto”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물질 이론의 틀을 설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면 여기서 논리학은 존재론과 하나의 일치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Hans Heinz Holz: Logos Supermaticos, Ernst Blochs Philosophie der unfertigen Welt, Darmstadt und Neuwied 1975, S. 129f.)
요약하건대 물질은 존재와 정신을 포괄합니다. 존재 그리고 정신은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이라는 범주에 내재하는 두 개의 소개념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엇으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는 아직 아님을 극복함으로써 참다운 실체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 역시 완전한 면모를 아직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 나은 현실적 삶의 기본적 조건이 충족되고 구체적 유토피아가 성취된다면, 인간의 정신은 본원의 의미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물질과 유토피아의 상호적 만남 = “전체를 위한 부분pars pro toto”이라는 교환의 특성이야말로 블로흐가 물질 철학에서 밝혀내려는 근본적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존재 그리고 의식은 논리적 관점에서 블로흐가 자신의 존재론을 피력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와의 일치성을 이루고 있으며, 세계의 변화 과정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습니다.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아직 아닌 무엇”에서 발현해 나오듯이, 물질 역시 인간의 의식에 자극을 받아서 어떤 새로운 형태를 연속적으로 산출해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은 물질 이론의 관점에서 존재론 그리고 논리학이 일치되는 바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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