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물질 이론 외에도 어떤 포괄적이고 예견적인 기능을 지닌 유토피아의 사변 이론의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다음의 사항을 강조합니다. 즉 사변이라는 개념은 긴급한 검증 그리고 이와 함께 원래의 의미에 대한 기억을 요청합니다. 왜냐면 오늘날 사람들은 사변적 행위를 별반 가치 없는 사고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변적 행위는 이를테면 증권거래소에서 행해지는 추론이라든가, 아무런 토대도 없고 뜬금없는 판타지 등의 의미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블로흐는 사변의 행위를 “speculari”라는 라틴어 단어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 단어는 “엿보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먼 지평을 바라보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블로흐는 상기한 방식으로 물질의 개념을 넓은 의미로 해명합니다. 이를테면 물질은 앞으로 향해 방향을 설정하는 힘이며 미래지향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자신을 개방하려고 움직인다. 그러한 한 물질은 아직 실행되지 않고 변모되지 않은 무엇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질이 유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은 왁스와 같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외화(外化)를 위해서 꿈틀거린다.” (Bloch, TE: 234). 여기서 물질은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죽어 있는 고체가 아니라, 조만간 새로운 무엇으로 출현하려는 에너지이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방향성을 견지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물질의 개념 영역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체Substanz”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에서 비롯한 존재이며, 물질로부터 자신을 발전시켜나가는 존재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은 물질 자체에서 태동한 고유한 아이라고 합니다. ”출생하는 인간은 물질에서 눈을 뜨고,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Bloch, TE: 203). 따라서 인간에게는 물질 그리고 정신 사이의 어떤 절대적인 대립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데카르트 방식의 이원론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물질은 주체 그리고 객체, 존재 그리고 의식 사이의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 관련성의 과정을 통해서 상호 변모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체와 객체, 존재와 의식은 완전히 낯선 무엇으로 서로 대립하지 않을 때 비로소 상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체가 물질에 대해 낯선 무엇으로 대립하게 된다면, 물질의 세력은 연속적 발전의 가정 속에서 결코 명징하게 각인될 수 없습니다.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정신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언젠가 레닌은 “물질은 인간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에 의해 보사되는 객관적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Lenin: Materialismus und Empiriokritizismus, in: Lenin Werke, Bd. 14, Berlin 1955 – 1965, S. 261.) 블로흐는 레닌의 이러한 주장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존재 그리고 의식은 블로흐에 의하면 물질이라는 거대 영역 속에 자리하는, 경미한 범위에서 이질적인 구성 성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현대 신유물론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신유물론은 주체와 객체를 물질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데, 이는 물질이 존재와 의식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는 블로흐의 사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블로흐는 존재와 의식 사이의 아포리아에 관해 자세하게 논했는데, 이는 주어진 사회적 현실의 복잡성에 기인할 뿐이며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블로흐는 물질의 철학사에서 물질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논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물질 개념의 특징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블로흐에 의하면 능력 그리고 에너지라는 두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의미는 능력 내지는 세력을 뜻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 δύνάμει ὅν”, 즉 잠재적 디나미스에 해당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물질의 수동적 의미를 뜻합니다. 이에 비해 “할 수 있음”의 의미는 무언가를 이행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 κατά το δυνατόν”, 즉 역동적 디나미스에 해당합니다. 이로써 블로흐는 물질 속에는 잠재적 특징과 역동적인 특징이 공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Bloch, TE: 208). 아리스토텔레스가 암시한 가능성 속에 자리하는 역동적 기능을 예리하게 포착한 자들은 아비켄나를 비롯한 중세의 아라비아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상기한 사항은 두 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로 물질에는 연속적으로 형태를 각인해내는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물질은 형태를 출현시킬 수 있고 그것을 변모하게 할 수 있는 결정적 전제 조건이며 모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능성으로 향하는 존재 κατά το δυνατόν”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변모는 외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물질 속에 이미 내재적으로 자리하는 특성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블로흐는 물질 속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자리하는데, 이것이 바로 형태를 출현하게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Bloch, MA: 144). 예컨대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속에 잠자고 있는 하나의 예술적 형체를 미리 고찰한 다음에 조각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진정한 예술적 형체를 위하여 대리석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었을 뿐”이라고 술회했습니다.
물질은 블로흐에 의하면 처음부터 완성되지도 완결되지도 않은 무엇입니다. 그렇지만 물질 속에는 언제나 연속적으로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완성하려는 충동 내지는 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완벽한 무엇을 탄생시키려는 충동이며, 완전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연속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각인해내는 에너지를 가리킵니다. 물질은 하나의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 물질 속에는 형태를 만들어내려는 충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물질을 단순히 왁스가 아니라, 엔텔레케이아의 각인 형태를 스스로 출산하는 자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칙은 물질의 운동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잠재적 역동성의 존재δυνάμει ὄν’로서의 물질 전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엔텔레케이아라는 사실이다. 그래, 물질은 그 자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엔텔레케이아이다.“ (Bloch, MA: 477).
블로흐는 인간 존재 역시 물질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존재 역시 물질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주관적 동인을 최대한 이용하여 기존의 것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앞으로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물질의 힘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블로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물질은 그 자체 아직 폐쇄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물질은 개방되어 있지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은 세계의 실체와 다를 바 없어요. 물질은 인간의 노력으로 함께 특정한 형체로 출현하고 변화된다는 점에서, 세계는 하나의 실험과 같습니다.“ (Reiner Traub u.a. hrsg.: Utopische Funktion im Materialismus, Gespräche mit Ernst Bloch, Frankfurt a. M. 1975, S. 27.)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즉 물질에 내재한 이러한 가능성을 활용하는 자야말로 적극적인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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