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 빙의의 시학, 영혼의 접붙이기

필자 (匹子) 2024. 8. 16. 09:47

친애하는 L, 가난한 형편에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필자의 내공은 여전히 깊지 못했습니다. 영재(英才)가 아니므로 이후에도 노력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학에서의 교편생활은 뒷배 없는 일꾼의 끈덕지고 힘든 노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연구 결과물은 풍족했지만, 노상 허겁지겁 쫓겨 다니듯 살았습니다.

 

이 와중에서 나의 위안은 무엇보다도 시 창작이었습니다. 뒤늦게 시집을 간행하려고 하니, 시편들은 마치 어두운 골방에 뒤엉킨 거미알처럼 보였습니다. 원래 문학 작품이란 발표 당시의 시대정신과의 관련성 속에서 만개하는 법입니다. 나의 시편들은 한국과 유럽이라는 두 개의 다른 현실에서 탄생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마치 백설 공주처럼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독자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모든 게 엉성하고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움은 때로는 다양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흔히 문학의 기능이 내면의 상투적 선입견 그리고 병적으로 굳어진 인성을 지적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하자를 어떤 문학적 상상을 동원한 비유로써 전해주는 데 있다면, 시인과 작가는 기상천외한 혁신적 관점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어설프게나마 어떤 고유한 방법론을 구상했습니다. 첫째는 가능하다면 하나의 작품에 다양한 관점을 도입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품은 중의적 암시를 통해서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글쓰기의 방법론으로서 시적 화자의 관점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종래의 시 작품들은 시인의 주관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시적 대상을 서술합니다. 이로써 시의 내용은 시인의 단선적 일방통행의 관점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필자는 시적 대상의 편에서 역으로 세계를 주시하려고 합니다. 마치 카메라의 시선이 반대편에서 다른 각도에서 투시하듯이, 다섯 가지 감각은 처음부터 타자의 관점으로, 혹은 동식물의 관점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변화된 관점은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오관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을 시적으로 인지하는 일종의 감성의 분할(le partage du sensible)’과 같은 방법론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여 시적 감성을 첨예화시키는 작업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상투성을 배격할 수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 그리고 다양한 감각을 고려하는 시 창작은 빙의의 시학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는 브레히트의 생소화 효과와는 반대되는시적 감정의 이심전심의 기능, 접심화(接心化) 효과일 수 있습니다. 생소화 효과는 주지하다시피 예술적 대상에 거리감을 취함으로써 독자의 이성적 비판을 극대화합니다. 이에 반해 필자는 시적 대상 속으로 스며들어 세상 그리고 나 자신을 관망하려고 합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외면된 타자, 혹은 다른 사물의 관점은 능동적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접심화 효과는 영혼의 접붙이기 작업입니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에서는 스웨덴보리의 진부한 접신론(接神論)으로 치부될지 모르나, 창작의 영역에서는 예외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세계는 타자(타인과 동식물)의 관점에서 관찰 가능합니다. 감정 이입을 통한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독자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합니다. 이러한 시도는 시 창작 방법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독자의 양심과 겸연쩍음에 자극을 가할 수 있습니다.

 

문제점(Problem)’은 문제를 일으키는 당사자 앞에서(pro)’ ‘비난을 가함으로써(blamage)’ 해결되는 무엇이 아닙니다. 왜냐면 대부분 사람은 어떤 특정한 견해 내지는 아집으로 무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어떤 이질적인, 혹은 정반대되는 견해를 들이대는 것은 처음부터 반발심만 부추기며 역효과를 가져다줄 뿐입니다. 빙의의 시학 내지는 접심화 효과는 일차적으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함으로써, 상대방의 지성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비밀을을 건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인간 본위주의의 편협한 시각을 예술적 방식으로 파괴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작용합니다.

 

이제 접심화 효과의 내용에 관해서 약술하려 합니다. 인간 동물은 생명체들로부터 많은 것을 강탈해왔습니다. 세상을 전유하기 위해서 사물을 남성적으로 그리고 전투적으로 투시하면서, 모든 것을 쟁취의 대상으로 깔보아왔습니다. 피상적 물신주의에 함몰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을 좌시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인공지능 및 자연과학의 실증주의로 증명해내는 오늘날의 정황 속에서는 형이상학이라든가 문학의 상상력은 언제나 불필요한 대상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여기에 첨가된 것은 국가 중심주의, 그리고 황금만능주의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가치는 권력과 돈에 의해서 평가되므로 영혼의 무엇, 여성적인 무엇 그리고 성적인 무엇은 수백 년 전부터 쟁취의 대상,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현대 사회의 물신주의 풍조, 경쟁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빈부 차이를 심화시키고, 인간 삶을 황폐하게 했으며, 급기야는 생태계 파괴 내지는 기후변화를 낳게 하였습니다. 빙하기의 시대에 우리가 구출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물질의 소중함과 여성과 흙에 대한 사랑일지 모릅니다.

 

물론 인간의 인식은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바라보고 싶은 것만 고찰하고, 자신의 관심이 향하는 방향대로 세계의 부분만을 투시합니다.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생명체 역시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물들의 겉모습만 바라보고 이를 유추할 뿐, 그들의 속내를 간파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열매, 혹은 후손을 배출한 뒤에 세상을 하직한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짝짓기가 그렇게 격정적인 까닭은 그들 역시 언젠가는 사멸한 다음에 다시 태어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문제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배후에 생명체에 대한 무의식적 폭력 내지는 우월감이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동물의 사랑을 흘레하는 짓이라고 규정하고, 식물의 사랑을 막연히 교접이라고 명명하지 않습니까?

 

동물과 식물은 인간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사람에게 오롯이 전달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어떤 다른 차원의 소통 수단을 지니는지 모릅니다. 가령 코끼리는 저주파로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돌고래는 의사소통을 위하여 초음파를 최대한 활용한다고 합니다. 일부 동식물은 페로몬이라는 화학 물질을 분비하여 서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식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청맹과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은 근대를 거치면서 인본주의라는 고상한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의 일방적인 투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본주의는 인간의 단선적이며 일방통행의 시각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에 해당하는 물질은 영원히 활용할 수 있는 처녀지에 불과했습니다. 차제에 우리는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눈을 찌른 다음, 생물과 무기질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계를 역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팔십억의 인간이 살아가는 인류세의 시대에 어쩌면 나 자신이 바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말대로 퇴비가 아닐까요? 인본주의는 차제에는 어떻게 해서든 토본주의(土本主義)로 거듭나야 합니다.

 

친애하는 L, 필자는 오래전부터 시인의 사명을 오르페우스에게서 찾고 싶었습니다. 오르페우스가 리라 연주를 곁들여 노래하면, 산천초목이 감동으로 부들부들 떤다는 이야기는 고대 신화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존재에게 작지만 오랜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의 머리()’를 수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필자의 시편들은 의향과 영향력에 있어서 오르페우스의 노래와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합니다. 그래도 몇몇 작품이 그저 열정적으로 회자하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리면서.

 

안산의 우거에서

박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