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반세기 동안 시를 써왔지만,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수없이 신춘문예에 낙방했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학문에 몰입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동안 연구 논문이 필자의 든든한 아들이었다면, 시작품은 그야말로 예쁘고 귀한 딸이었다. 체질적으로 근엄한 가부장과는 거리가 먼 에코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지만, 어리석게도 언제나 아들만 세상에 내보내고, 딸을 서랍 속에 가두어 놓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외국어 번역 시집을 해외에서 간행할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 역시 부질없는 짓거리라고 판단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나의 딸들은 갑갑한 공간에서 얼마나 자주 서러움의 눈물을 흘렸을까? 뒤늦게 과년한 딸들에게 예쁜 드레스를 입혀서 처음으로 예식장에 들어선다. 하객들 가운데 누가 내 딸의 아름다움에 매혹될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에는 나라 밖에서 서성거리는 자가 견지하는 두 가지 정서가 용해되어 있다. 첫 번째의 정서는 한반도에 대한 사랑과 관련된다. 나라를 떠나면, 나라에 대한 그리움은 자연스럽게 강화된다. 예컨대 외국에서 살아가는 한인들 가운데 애국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내면의 귀소본능에서 비롯하는지 모른다.
두 번째의 정서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가리킨다. 등하불명이라,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의 본질을 간파하기 어렵다. 국경 밖에서는 한반도의 여러 면모가 의외로 명징하게 인지된다. 고향에서 습관적으로 여러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흐트러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언자는 고향에 머물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Propheta non valet in patria sua”는 속담이 태동하게 되었을까?
상기한 감정은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인간관계는 당김과 밀침이라는 물리 역학적 관계로 설명될 수 있을까? 당김이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열광적 반응이라면, 밀침은 지루함에서 유래하는 냉소적 반응이다. 멀어질수록 우리는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싶어 한다. 가령 멀리서 인디언 사내가 피리를 불면, 인디언 처녀는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다.
매일 함께 지내면 그리움의 감정 대신에 어처구니없게도 따분한 권태가 떠나지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만남은 항상 애틋하지는 않다. 예컨대 고객과 상인 사이의 만남은 두 개의 당구공의 밀침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것은 일회용의 부딪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쨌든 그리움과 부담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 그리고 시간적 차이에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들은 분산 그리고 집약이라는 두 가지 정서로 설명될지 모르겠다.
역사의 방향은 두 가지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역사의 중심부에서 출발하여, 가장 먼 곳으로 향하는 발전의 여정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역사의 중심부로 되돌아오는 귀환의 여정을 가리킨다. 이를 고려하면 인간의 모든 역사 또한 분산과 집약으로 설명될지 모른다. 철학자, 셸링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외국으로 뻗어 나가는 발전으로, 『오디세이아』를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귀환으로 해석했다. (Schelling, Friedrich wilhelm Joseph: Philosophie und Religion, Werke VI, S. 57).
트로이 전쟁이 아킬레우스를 외국으로 향한 모험과 방랑으로 인도했다면, 오디세우스는 전쟁 이후에 귀환하는 과정에서 온갖 희로애락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작품 역시 두 가지 정서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하나가 다른 나라로 멀어지는 외로움의 원심력이라면, 다른 하나는 “귀환의 괴로움 (nostos + algos)”으로 근접해나가는 구심력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거부하며 살고 있는가?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이별과 분단 그리고 추방의 삶을 영위해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만남과 통일이 절실하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 통일이 되든 않든 간에 한인들이 간직해야 하는 “송아리얼”(함석헌)은 압록강과 두만강 아래에 오밀조밀 갇혀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 데 비하면 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여러 이유에서 분리 독립을 선호하는 것 같다.
가족 구성원의 정이 끈끈할수록, 결합과 통일의 열망이 강력할수록, 그 이면에는 배타적 선민의식이 솟구치는 법일까? 배타적 국수주의는 이를테면 오늘날 이스라엘인들에게서 발견되곤 한다. 수천 년 동안 피해자로 살아온 그들은 단기간에 다른 민족을 공격하는 가해자로 둔갑하지 않았는가? 어쨌든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추진하되,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관점에서 출현하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수미일관 경계해나가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 약 10년의 세월을 버티면서 살았다. 돈과 시간을 아끼려고 일시귀국도 하지 않았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윤노빈) 학위 취득에만 골몰했으므로, 이기적으로 처신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마치 키르케의 농간으로 “누런 돼지”로 변신한 오디세우스처럼 낯선 동굴에 칩거한 셈이다. 그래, 결코 소시민으로 살지 않으리라는 청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한 점 지금도 몹시 부끄럽게 생각한다. 시집을 외국에서 거주하는 필자의 지인들에게 바치고 싶다.
안산의 우거에서
필자 박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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