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페쳐: 오늘날 실증주의가 주도적으로 자리하는 현상은 아쩌면 다음과 같은 성향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닐까요? 가령 현재 상태에 대한 저항은 오늘날 반역자로 매도되는 경향 말입니다. 오늘날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은 개인주의적이고 아나키즘적인 특성을 더욱 강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요?
블로흐: 당신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어요. 아주 일반적으로 (아니 너무 일반적으로) 단언하자면 이론의 결핍 때문에 드러난 특징으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체적 현실적 상태와 일치되지 않는 이론을 탐색해서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그러한 이론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변증법적으로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추구하려는 방향 속에 개인주의의 속성으로 화하거나 개인주의로 머물든가, 그게 아니라면 작은 그룹과 같은 섹트주의라는 위험성이 자리하고 읶다면,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위험성은 어떤 요구 사항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저항의 형태가 어떠한 특징을 드러내든지 간에 우리는 저항하고 거역하는 자들이 내면에 어떠한 불만을 품고 있는지를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저항하는 모습이 매우 추상적이고 아나키즘의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이론을 견지하지 않으면, “현재 상태Status quo”에 불만족의 감정을 느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설령 이론이 하나의 척도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하고 발전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주어진 현실의 구체적 상태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는 이론을 생각해 보세요. 어설픈 이론은 사회적 변화를 강하게 촉구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중의 운동을 위한 재료로 적절하게 활용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우리는 헤겔의 논리학, 제 1장에서 하나의 첨예하고도 깊이 있는 언급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쥐 한 마리가 탈출구 없는 공간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쥐는 그저 주위를 빙빙 돌고 있습니다. 놈은 벽에 부딪치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보기에는 쥐에게 어떤 한계가 있습니다만, 놈은 아무런 장애물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라면 갇힌 공간을 인지하겠지요. 이때 자신이 수인(囚人)이라고 느끼며, 주먹으로 벽을 내려치게 될 것입니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하나의 장애물을 분명히 통찰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이미 장애물을 넘어서 있으며, 자신의 의식은 장벽의 건너편에 머물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의 내면에는 척도, 다시 말해서 감옥 바깥의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경우 자유는 장애물을 하나의 차단으로 인지하게 하므로, 당사자는 장애물에 대해서 완강히 저항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는 불만족 속에 어떤 긍정적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는 무엇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긍정적 요소는 이론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면의 함축성은 외부의 명징성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건 아마도 아나키즘 사상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에 주어져 있는 확실한 “팩트”를 고려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사실이 더욱더 끔찍하다.”는 외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공허하고, 임의로운 무엇을 위해서 혁명 속으로 빠져들어서는 아니 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유행가 가사에서 나오듯이- 과정이 이끌고 안내하는 의지와의 일치감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반드시 발견해야 하는 과정의 성숙함을 미리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숙하고 영글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네 관한 연구이며, 구체적 현실 상태 그리고 이를 파괴하고 뒤집어 앞는 일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하겠지요.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평가하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주어진 팩트 속의 무엇이 우리의 자유를 차단하고 방해하는가를 구첻적 사항으로서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이론입니다. 더 이상 오래 견지할 수 없으므로 새롭게 다듭고 긴급하게 요청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기서 오로지 방향성이지요. 우리는 인간이 앞으로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을 그런 식의 생명 없는 천편일률적인 전체주의로 획일화시키는 사고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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