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2) 청춘 시대, 실험 예술, 실증주의 비판

필자 (匹子) 2024. 5. 6. 09:03

(앞에서 계속됩니다.)

 

페처: 말하자면 당신은 고전의 사변 철학에 근거한 철학관을 배운 다음에 독일의 대학에 발을 들인 셈이로군요. 입학을 위해서 누군가와 만났을 텐데요. 당신은 어떠한 계기로 뷔르츠부르크의 오스발트 퀴페와 같은 지도교수를 만나게 되었는지요?

 

블로흐: 앞에서 간략히 암시했듯이 처음에 뮌헨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지녔지요. 원형과 같다고나 할까요? 만약 히틀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날에도 동경했을 것입니다. 뮌헨은 과거의 많은 전통을 보존하고 있지요. 청년 양식 그리고 “11명의 사형집행인”이라는 놀라운 도시 아닙니까? 베데킨트의 연극이 공연되었으며, 프란츠 마르크와 칸딘스키의 미술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지요. 1905년에 뮌헨으로 향했습니다. 뮌헨으로 떠난 까닭은 키가 큰 보헤미안 여성 그리고 키가 작은, 자유분방한 17세의 여배우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여배우는 철학 교수 테오도르 립스보다도 나에게 더 중요했지요. 내가 사숙할 철학 교수들은 이미 100년 전에 사망한 자라고 여겼습니다. 헤겔 그리고 헤겔 좌파, 셸링과 피히테 등을 숙고했거든요. 그렇기에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철학 외에 대한 분야의 관심사는 차치하고라도 말이지요.

 

당시에 나는 철학을 주 전공으로, 부전공으로 물리학과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호프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스팔란차니 박사처럼 음악과 물리학을 접목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 역시 자동 기계인형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백 년 전에 떠올랐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자연과학의 놀라운 기적이 100년 사이에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철학 공부에 관해서 말하자면 뮌헨이나 뷔르츠부르크 사이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그 여대생과 사귀는 게 더 중요했지요. 그미와의 사랑으로 인해 인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간섭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나의 사고 그리고 내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았거든요. 그밖에 오스발트 퀼페는 고결한 마음을 지닌 교수였습니다. 나의 학위 논문에 동조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6학기 수업을 이수한 다음에 나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학위를 마친 다음에 바로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과 우정을 돈독하게 맺게 되었지요. 학위 취득 전에 나는 그와 안면을 익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인 유일한 철학자였습니다. 물론 당시에 내가 헤르만 코엔과 마르부르크의 신칸트학파 사람들에게 약간의 존경심을 품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빈델반트와 후설을 좋게 여기고 있었지요. 물론 빈델반트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사 저자였지만 말입니다.

 

페처: 당신은 베를린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향했습니다. 당신이 철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블로흐: 하이델베르크와 나는 서로에게 중요했습니다. 대학에서 직접적으로 행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옛날 친구인 죄르지 루카치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전에 부다페스트에서 안면을 익힌 적이 있거든요. 하이델베르크에는 막스 베버 서클이 있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인물들 가운데에는 재미있는 자들이 많았지요. 교수들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따라다니는 말벌과 같은 자도 있었고, 술 취한 기관사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신문의 문화 란에 잡문을 써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철학적 기본이 덜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의 글들은 무가치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고인이 된 분들이 많아서 일일이 거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크에는 정신적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주위에는 루드비히스하펜과는 전혀 다른 묘한 문화적 아우라가 퍼져 있었지요. 모스크바라든가 오래전의 에스파냐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정취를 만끽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이하게 뒤섞여 있었어요. 이때부터 약 3, 4년 동안 루카치와 거의 공생 관계를 맺었습니다. 마치 서로 소통하는 관처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주고받았지요. 당시에는 틈만 나면 가르미슈로 떠나 그곳의 서재에서 독서와 집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와 가르미슈를 오가면서 살았지요. 바로 여기서 나의 초기 작품들이 탄생했습니다. 그것들은 창문 밖으로 알프스산맥을 바라보면서 바이에른에서 완성되었지요. 루카치와 만났다가 헤어지면, 나는 가르미슈에, 루카치는 하이델베르크 등지에 머물렀습니다. 한 두 달 후에 다시 만나면, 우리는 이전에 나누던 대화를 지속했지요. 너무 자주 만나다 보니, 우리 사이에는 근친한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사이에는 이른바 근본적 차이라는 자연 보호 구역이 생겨났지요. 의견이 대립할 때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이를 종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추밀 고문관의 살롱과 같은 곳을 들락거리면서, 몇몇 사항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기도 했지요. 이러한 만남은 나로서는 필연적이었고, 루카치에게는 습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일원성,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대화를 통해서 에크하르트 선사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공유했습니다. 루카치는 문예학, 예술 이론, 특히 키르케고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여지 없이 쏟아내었지요. 이러한 지식들은 당시에 나에게는 무척 생소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뿐이지요. “내가 아는 것은 카를 마이Karl May와 헤겔Hegel밖에 없어. 그 밖의 모든 이론은 이 두 가지를 서로 결합하거나 뒤섞은 무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왜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야 하지?” 이러한 말은 젊은이의 멋진 호언장담 같지만, 따지고 보면 설익은 학자의 단호한 거부감을 담고 있었지요. 대화 내용의 폭에 있어서는 루카치가 나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객관적 사고, 시스템에 합당한 출현이라든가, 존재론에 관한 지식을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루카치는 인간적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론적 체계, 풍경 그리고 자연의 시스템에 관심을 더 기울였지요. 나의 관심사는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헤겔의 철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기이하게도 우리는 가장 엄격한 체계, 모든 대상 등을 그것이 인지되는 장소에 국한해서 이해하는 방식을 차례차례 배웠습니다. 마치 가정주부가 모든 빨래를 특정한 방식으로 널어놓듯이, 철학자 역시 자신이 다루는 모든 대상을 특정한 체계로 배열해야 하니까요. 가정주부는 빨래를 쉽사리 찾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만, 철학자는 자신의 인식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위상학이야말로 철학의 절반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자유의 파토스, 보헤미안, 신문의 문예란 등에 대항하는 질서의 파토스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러한 분위기를 나중에 표현주의의 사회학이라고 지칭하기도 했지요. 어쨌든 우리는 고리타분한 질서 숭배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스스로 질풍과 노도의 욕구를 지닌, 비교(秘教)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자신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열광적인 무엇을 토로하기를 기대했지요. 사실 엄청난 독서 후에 과거를 떠올리는 추밀원 고문관의 살롱에서 오랫동안 우리의 지식을 설파하곤 했습니다. 나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헤겔에 관해서 많은 것을 토로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토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멜로디를 각자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