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4) 청춘 시대, 실험 예술, 실증주의 비판

필자 (匹子) 2024. 5. 9. 09:14

(3에서 계속됩니다.)

 

페쳐: 당신이 『유토피아의 정신』을 집필할 때, 10월 혁명이 이지 전개되고 있지 않았는가요?

 

블로흐: 당시에 우리 두 사람은 소련의 10월 혁명을 오랜 갈망이 마침내 성취된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당시에 루카치는 이 사건에 대해 나보다도 더 강렬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지요. 폭동을 일으키는 노동자 부대를 이끄는 적군 단원에 관한 알렉산더 블로크Alexander Blok의 시가 떠오르는군요. 혁명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데, 루카치는 이 시를 읽고 나보다도 더 깊은 강동을 받았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루카치는 키르케고르와 보스도옙스키에서, 나는 헤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키르케고르 그리고 러시아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니까요. 어쨌든 10월 혁명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물론 우리는 유토피아를 서로 다르게 파악했습니다. 루카치는 유토피아를 터무니없는 무엇 내지 열광적인 감흥으로 이해했지요. 그렇지만 유토피아는 기존의 것들 속에 넘쳐흐르는 어떤 가능한 무엇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아직 의식되지 않은 무엇이며, 세상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무엇 말입니다. 나중에 기억하건대 1920년경에 루카치와 의견 대립으로 대판 싸워야 했습니다. 당시에 비판을 제기한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당시에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변모한다고 말했는데, 대체 그러한 거대한 진보가 존재하는가? 사회주의는 인간을 위한 도덕적 배경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자신의 판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유토피아주의자는 언제나 ‘어째서?’ 그리고 ‘어디로 향해서?’라는 물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우리는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이를 더 이상 강조할 수 없단 말인가? 가까운 목표만 중요하게 여기고 먼 목표는 등한시해도 되는가? 먼 목표를 위해서 가까운 목표를 희생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 목표의 현재성을 무시해도 되는가?

 

페쳐: 오늘날 서방세계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철학적 사고는 –비판적으로 고찰하건대- 실증주의 내지는 신-실증주의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실제로 증명 가능한 사실만을 받아들이고, 분석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시적 사항 외의 것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사고는 당신의 희망의 원리와 결부된 철학적 구상과 자세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나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과제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는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을 끌여 들임으로써, 자신의 특별한 권한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사고는 마치 단순한 인간의 편협한 시야와도 밀착되어 있는데, 실증주의 역시 이러한 단편성과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블로흐: 신-실증주의는 데이비드 흄뿐 아니라, 사고 경제주의를 표방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마흐는 눈앞의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한 검증, 관찰로 표기된 “팩트”만을 하나의 사실로 인정했지요. 이러한 “팩트”는 사실보다도 더 편협한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팩트”는 주어진 사실보다도 더 좁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지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놀랍게도 “학문성Wissenschaftlichkeit”이라는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실증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념을 통해서 사회적 임무를 명징하게 밝힐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기이하게도 실증주의가 활발하게 인정받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증주의는 드러난 사실만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경향을 반영한 사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드러난 사실은 이루어진 것에 대한 가시적인 반응이며, 때로는 사물로 인지되는 과정의 순간에 불가하지요. 이 경우 과정은 정지된 무엇으로 대치됩니다. 그렇게 되면 눈앞에 주어진 것들만이 진리의 척도가 되고 판단의 근거가 되지요. 이러한 현상에 개입하는 것은 보수주의라는 사고입니다. 모든 사상적 변화를 용납하지 않고, 기존하는 것을 뛰어 넘으려는 운동을 거부하니까요.

 

경향성, 잠재성 그리고 과정은 지극히 물질적이며 물질 이론적인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발전의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지요. 실증주의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처음부터 사라져 있어요. 그렇게 되면 혁명적 자극이라든가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그리고 가능성의 배후를 찾으려는 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만약 주어진 것에 만족하게 된다면, 나는 주어진 사실이라는 존재를 진실의 척도로 삼으라고 판사에게 요구하고, 모든 사상 또한 가시적으로 주어져 있는 무엇으로 축소하게 되겠지요.

 

이에 반해 나는 아직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오래된 여러 가지 법적 카테고리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연과학의 카테고리가 아니지요.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은 진정한 법에 관한 질문, 즉 자연법에 관한 물음입니다. 도덕적인 물음 내지는 미학적인 물음과 여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자연법 속에는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시민적 자유에 대한 요구 사항, 자유의 가능성을 창안해내는 문제 등을 생각해 보세요. 시민 주체는 노예가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 살기 위한 삶의 전제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과업을 창출해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기존하는 것이 그들에게 진리의 척도였던가요> 오히려 기존하는 것들은 진정한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 주체들이 파기해나가야 하는 무엇이 아니었습니까? 18세기의 경찰국가 그리고 그 곁에 자리하던 봉건 국가 등은 모조리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주어진 사실은 진리에 대한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나중에 반드시 다른 진리로 대체되어야 했습니다.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진리를 주어진 사실보다도 더 끔찍한 진리라고 매도했지요.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