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 참여자: 에른스트 블로흐, 죄르지 루카치, 이링 페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인 방청석에는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 Baptist Metz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1967년 9월 19일에 독일 헤센 TV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다. 출전은 다음과 같다. Rainer Traub (hrsg.). Gespräche mit Ernst Bloch, Suhrkamp: Frankfurt a. M. 1980, S- 28 - 40.)
........................
페처: 블로흐씨, 당신은 아주 이른 나이에 철학에 몰두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 루드비히스하펜 그리고 만하임의 분위기가 당신의 청춘 시대에 상당히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10대의 나이에 받았던 자극이라든가, 이때 견지하게 된 영향에 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블로흐: 첫째로 젊은 시절에는 배우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학문에 대한 갈망을 자연스레 충족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아무런 자극이 없었으며, 학교에서는 따분하고 지루한 삶이 이어졌으니까요. 학교에서는 지식을 막무가내로 주입하려는 선생들에 의해 시달렸습니다. 대신에 학생들 가운데에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지닌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저항하고 반항하는 야권의 입장을 키워나갔습니다. 둘째로 만하임과 루드비히스하펜 사이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두 도시의 분위기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루드비히스하펜은 내가 태어났을 때 생긴 지 50년 되는 신도시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만하임은 오래전에 선제후가 거주하던 수도로서 중세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루드비히스하펜에는 잿빛 공장이 가득했지만, 만하임에는 거대한 궁궐이 과거시대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비되는 분위기는 작은 강의 좁은 다리로 나누어졌지요. 마치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한 곳에는 찢어지는 음이 들렸다면, 다른 한 곳에는 오래전의 문화적인 음향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루드비히스하펜은 인구 7만의 도시였는데, 그 가운데 5만이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인문계 김나지움을 다니던 나는 사민당의 잡지를 간행하던 사람과 사귀었습니다. 야권 세력은 서로 연대를 이루고 있었지요. 이른 나이에 많은 전단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형편없는 유물론의 글도 있었습니다. 「모세 혹은 다윈」, 「어느 무신론자의 산책」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무신론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13세의 나이에 나는 공책 한 권에다 “물질 이론의 시스템”을 저술했습니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질은 모든 존재의 어머니다.” 물질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나는 항상 맨 나중의 모음을 강조했지요. 그렇게 해야만 어머니의 뜻이 더 강하게 드러날 테니까요. 루드비히스하펜은 독일의 몇 안 되는 강변의 도시였습니다. 강변에는 공장이 즐비하여 조용하고 안온한 내일을 기약해 주지는 못했지요. 강의 반대편에는 만하임이라는 고색창연한 문화가 터를 잡고 있었지요. 그곳의 극장에는 부르주아들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는 18세기 중엽에 이곳을 다스리다가 뮌헨으로 이주했지요. 극장은 참으로 화려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오페라 음악에 매료되곤 했습니다. 만약 철학적 재능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작곡가가 아니라, 지휘자가 되었을 거예요.
만하임에는 놀라운 천문대가 있었고, 너무나 멋진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60년 이후로 새로운 철학 서적이 입고되지 않았지요. 상업 도시의 독자들은 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도서관이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도서관에는 라이프니츠와 헤겔의 휘황찬란한 전집들이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16세, 17세, 18세에 나는 바로 이 도서관에서 헤겔의 사상과 헤겔학파를 섭렵했습니다. 도서관에서 헤겔을 읽을 때 나는 마치 1820년에 강의실에서 헤겔의 강의를 듣고 있는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무척 가끼이서 신선하게 철학자를 알게 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무척 에로틱한 감정으로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읽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일기장에다 “거기에는 정신적 나이팅게일이 노래하고 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공원에서 혹은 광야에서 청아하게 노래하는 꾀꼬리를 상상해 보세요. 당시에 나는 이런 식으로 정신 현상학을 읽었습니다. 물론 잘못 이해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부분적으로 의미심장한 깊은 사고를 접할 수 있었지요. 헤겔의 언어는 열대 지역의 식물학을 연상시켰으므로 내 마음을 흥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나이든 헤겔의 글은 별반 자극을 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글을 젊은 사내가 기록한 문장으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쨌든 만하임과 루드비히스하펜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라인강 사이로 자리한 두 개의 다른 영역은 마치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의 차이를 떠올리게 했지요. 저편에는 과거의 오래된 문화가 자리한 데 비해, 이편에는 거칠고 황량한 미래가 도사리고 있다고 할까요? 그래, 루드비히스하펜은 떠들썩한 상가 중심으로 연시(年市)가 있었으며, 카를 마이Karl May의 소설에 등장하는 생동감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상가의 간판에는 “황야의 아들에게 향해서”라든가, “사형집행인에게” 등이 적혀 있었으니까요. 경제적 이윤 추구를 고려하면 현실적으로 적절한 간판 이름이 아닌가요? 나는 이러한 상점에만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식당은 바이에른 왕국의 철저한 규칙에 따라 영위되었기 때문에, 김나지움 학생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으니까요. 부모님은 좋은 의도이기는 하지만 집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어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솟구쳤습니다. 그건 뮌헨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었지요. 어쨌든 만하임과 루드비히스하펜은 완강하고도 기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라인강의 왼쪽에는 거칠고 생동감 넘치는 미래의 풍경이 자리했다면, 라인강의 오른쪽에는 고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분위기는 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보상받지 못한 과거가 찾아온다는 전통적 의미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과거 속에 자리하는 미래가 언제나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임무를 부여한다고나 할까요? 과거의 탐색이 즉시 우리 자신의 방향을 파악하게 해주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어떤 놀라운 결실을 멪을 수 있는 무엇이 도사리는 게 아닐까요?
(계속 이어집니다.)
'30 bloch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로흐: (3) 청춘 시대, 실험 예술, 실증주의 비판 (0) | 2024.05.07 |
---|---|
블로흐: (2) 청춘 시대, 실험 예술, 실증주의 비판 (0) | 2024.05.06 |
박설호: 블로흐의 "재기억" 비판 (0) | 2023.11.14 |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3) (0) | 2021.11.08 |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2) (0) | 2021.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