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에서
박설호
유학이 싫다면서
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
농촌으로 돌아간 형아
우습게도 나는 이곳
알프스의 끝 간 데에 서서
가을장마 물꼬 터줄
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
까까머리들 가르치다
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막일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다운 이곳 사람들
결코 거꾸로 돌지 않는
롤렉스 시계를 수리하거나
침 발라 돈이나 세며
주말이면 호수 가에서
뱀처럼 마구 허물 벗으며
꼬물꼬물 사타구니를
일광욕시킨다
새 소리에 익숙하여
그들의 귀는 듣지 못한다
타국에서 일어나는
피 맺힌 아우성을
국경 건너온 거액 탓일까
당신은 알고 계시리라
힘 앗긴 나라의 세금
안전한 이곳의 금고 속에서
먼지 묻은 눈물 흘리고
중립적인 이곳 사람들
가난을 쳐다보기 싫어
오래전에는 유대인들을
최근에는 쿠르드족 쫓아내고
보이지 않는 힘 무섭다고
가끔 광장에 모여
뭐가 그리 두렵고 답답한지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방위 훈련만 받을 뿐
유학이 싫다면서
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
농촌으로 돌아간 형아
우습게도 나는 이곳
알프스의 끝 간 곳에 서서
가을장마 물꼬 터줄
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
몽실 아이들 가르치다
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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