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취리히에서'

필자 (匹子) 2024. 1. 3. 17:31

 

취리히에서

박설호

 

 

유학이 싫다면서

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

농촌으로 돌아간 형아

우습게도 나는 이곳

알프스의 끝 간 데에 서서

가을장마 물꼬 터줄

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

까까머리들 가르치다

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막일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다운 이곳 사람들

결코 거꾸로 돌지 않는

롤렉스 시계를 수리하거나

침 발라 돈이나 세며

주말이면 호수 가에서

뱀처럼 마구 허물 벗으며

꼬물꼬물 사타구니를

일광욕시킨다

 

새 소리에 익숙하여

그들의 귀는 듣지 못한다

타국에서 일어나는

피 맺힌 아우성을

국경 건너온 거액 탓일까

당신은 알고 계시리라

힘 앗긴 나라의 세금

안전한 이곳의 금고 속에서

먼지 묻은 눈물 흘리고

 

중립적인 이곳 사람들

가난을 쳐다보기 싫어

오래전에는 유대인들을

최근에는 쿠르드족 쫓아내고

보이지 않는 힘 무섭다고

가끔 광장에 모여

뭐가 그리 두렵고 답답한지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방위 훈련만 받을 뿐

 

유학이 싫다면서

출국하려는 나를 비웃고

농촌으로 돌아간 형아

우습게도 나는 이곳

알프스의 끝 간 곳에 서서

가을장마 물꼬 터줄

당신의 쟁기를 떠올린다

몽실 아이들 가르치다

손에 묻은 분필가루 또한

 

.....................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