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청설모'

필자 (匹子) 2024. 3. 2. 10:10

청설모

박설호

- “여자들은 늘 쫓기는 꿈을 꿉니다.” (김혜순)

 

수컷인데도 늘 쫓기는 꿈을 꿉니다

 

꿈이었어요 저녁 거미가 내리자 버스를 타고 그미에게 향했습니다 도토리를 선물하고 싶었지요 버스는 그미가 사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어리둥절했지요 푸른 눈의 다람쥐들이 검붉은 내 얼굴을 노려보았어요 황급히 에버스베르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거기서 지하철 노선을 읽었습니다. * 괴상한 외국어라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다행히 “대학교” 역이 눈에 띄었지요 ** 아니 기말시험을 까마득히 잊고 돌아다니다니 일순간 나 자신이 미워졌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속삭임을 가을귀로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코맹맹이 음성이었지요 예야 마음 편하게 먹으렴 아 어머니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낯설고 추운 땅에서 나는 검붉은 그림자가 되고 검붉은 그림자는 나로 변신하는 것 같아요 오늘따라 나 자신이 마치 끓는 솥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느껴집니다 *** 그렇다고 모든 삶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지요 사랑하는 그미의 겨드랑이 내음 그리고 페트리코 흙냄새에 취해 미소 짓곤 하니까요 기쁨은 오랜 아픔 사이에서 드물게 동태눈을 깜박거린다니까요 꿈속에서 사랑하는

 

그미와 풍선을 타고 하늘도 납니다

 

 

* 에버스베르크는 뮌헨에서 서쪽으로 3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대학교”는 뮌헨의 지하철 (U3, U6)의 역이름이다.

*** “부저유어(釜底遊魚): 후한서(後漢書) 86권 열전(列伝) 제 46 장강전(張綱伝)을 참고하라.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울력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