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벤야민의 개념, '깨닫는 사고 Eingedenken'

필자 (匹子) 2023. 12. 14. 10:15

Eingedenken 은 "회상"으로, 혹자는 "불망 不忘"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혹자는 회억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자는 기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자구적으로 고찰할 때 어떤 상념을 떠올리는 행위입니다. 홍윤기 교수는 메츠의 신학 사상을 번역할 때 이 단어를 "명심 "이라고 번역한 바 있습니다. 명심이란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gedeneken 이라는 단어에 접두어 ein- 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번역의 난해함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언어학적 차원보다는 벤야민의 사고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사고가 이미 과거에 존재한 사고 내지 생각을 "재기억 remember, anamnesis"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Eingedenken 과거의 사고를 다시 기억해내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생각을 능동적으로 도출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본 것 De ja-vu"을 다시 뇌리에 떠올리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한 착상을 능동적으로 도출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블로흐가 추적한 "아직 아닌 존재 das Noch-Nicht-Sein"와 결부됩니다.

 

이는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 선사가 말하는 "고정된 지금 nunc stans"의 응축된 새로운 사고 내지 착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벤야민이 활용했던 지금 시간Jetztzeit 과 연결됩니다. 이를테면 가난하고 못 배운 자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계급의 문제를 새롭게 떠올리는 경우를 고려해 보세요. "지금 시간"은 응집된 사고를 의식 속에서 새롭게 인지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벤야민은 과거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떤 아우라를 생각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명심 내지 재기억은 과거에 존재했던 진리를 다시 한 번 수동적으로 막연하게 떠올리는 행위를 가리키므로, 여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Eingedenken "솟아나는 착상", 머리속에 새겨넣는 사고로서의 "깨닫는 사고"으로 번역하는 게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