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죽은 뒤에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가? (2)

필자 (匹子) 2021. 11. 8. 11:11

3. 첫째로 스파르타쿠스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은 언젠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죽은 뒤에 대화를 나눌 상황에 처할 경우, 내가 과연 누구와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질문 자체가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군요.

 

예컨대 죽은 뒤에 스파르타쿠스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매우 긴장감 넘치는 일일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과 담소를 나누는 것 역시 흥미진진할 테지요. 죽은 뒤에 헤겔과 담소를 나누게 되면 흥미진진한 긴장감을 느끼리라고 여겨지는군요. 아직 발효되지 않은 무엇,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엇 그리고 모순적인 무엇에 관한 대화를 생각해 보세요. 헤겔은 이러한 것들을 변화되는 움직임으로서의 개념의 흐름 이해하였으으로 이해했으며, 그런 식으로 강연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죽은 뒤에 이런 방식으로 스파르타쿠스, 바울 그리고 헤겔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과 개별적으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빠짐없이 서술하는 것은 어쩌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요. 예컨대 스파르타쿠스는 내심 어떠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을까요? 어째서 그가 노예로 태어났으며, 마음속에 어떠한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어떠한 전망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역사서는 그의 무장 봉기와 죽음만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입니다. 물론 후세 사람들은 그에 관한 일부의 사항만을 밝혀내었을 뿐입니다. 즉 스파르타쿠스는 발칸반도의 동부인 트라키아 지방 출신이라는 점 말입니다. 트라키아 사람들은 선한 여신이라고 명명되는 “보나 데아”를 모시는 풍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르타쿠스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추구하던 모권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었지요. 어쩌면 그의 마음속에는 모권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감상적인 의향이 무의식적으로 자리했는지 모릅니다. 모권의 시대에는 만인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죄를 저지른 자는 “선한 여신”의 사원 안으로 잠입하여 여신의 옷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추적자는 그를 더 이상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선한 여신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을 가슴에 끌어안고, 오랫동안 처형장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가미는 느슨해지고, 그리스도의 척추가 부러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이 경과된 다음에 친척들이 다가와서 정신을 잃은 그미를 부축하면서 집으로 데리고 갔지요. 마리아 역시 “선한 여신bona dea”의 역할을 지속한 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어쨌든 나는 스파르타쿠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현재 통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잊힌 정의로움이 존재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는 나에게 핍박당하고 고통당하는 힘없는 여성성을 되찾는 평등의 가르침을 전해주리라고 믿습니다.

 

4. 둘째로 사도 바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로써 우리의 관점은 두 번째 사항에 해당하는 사도 바울과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과의 담소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남긴 편지들을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은 성서의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 계시록 속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심판일이라는 섬뜩한 표현을 생각해 보세요. 실제 세속적인 법정에서 교수대는 목재를 도둑질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목재를 절도한 자를 처벌하는 도구가 바로 교수대였지요. 그런데도 신은 목재를 절도한 자를 처벌하는 도구로 살아남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기막힌 오해를 드러내고 있지요. 실제로 법정은 아주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지옥의 형벌을 내리지 않았던가요? 당시 그러한 죄인들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법 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범죄는 어쩌면 사회적 정황이 야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그들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던가요?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을 코너에 몰아넣는 긴박한 요구사항을 마련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법의 형태 그리고 법적 기능에 관해서 왈가왈부합니다. 지금까지의 법의 개혁에 있어서 천국의 정의로움이 도래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법적 정의를 심판하는 신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신과는 동일한 분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설교에서 등장하는 하나의 사상적 싹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너희가 처벌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을 처벌하지 말라.”

 

그렇지만 세계를 창조하신 신은 구약성서에 항상 등장하며, 부분적으로 신약성서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지막에 이르러 최후의 법정에 앉아 있습니다. 신은 이른바 전지전능한 분이며, 모든 권한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훼신은 처음부터 엄청난 불법을 자행할 수 있는 권한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불법적인 상황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피 흘리게 만드는 분은 바로 야훼신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전쟁, 억압, 약탈 등과 같은 온갖 비인간적인 짓거리로 고통을 당하면서 하늘로 향해 도와달라고 울부짖는데, 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모든 끔찍한 사건을 묵묵하게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희생양이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다시금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야훼 신은 생존을 위해 죄를 지어야 했던 인간들을 재차 징벌합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사실과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사도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체 최후의 심판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얼마나 끔찍한 파국 내지 신의 사악한 본능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최후의 심판이 개최되는 곳에서는 하늘로부터 그리고 높은 곳으로부터 자행되는 모든 불법 그리고 모든 법적인 독재 행위가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일에 판관은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장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