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상처 입은 자아 그리고 심장의 아픔은 죽음을 초래한다.: 니무어 공작으로서는 클레브 부인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임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니무어 공작은 자신의 친구에게 이 사실을 전했는데, 친구의 여자 친구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클레브 부인이 니무어 공작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왕궁에 퍼지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 니무어 공작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 클레브 왕자는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에 결혼한 것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궁궐의 법도를 의식하며 신중하게 행동했습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아내의 고백을 듣는 순간 클레브 왕자의 가슴은 그야말로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자존심은 왕궁에 퍼진 소문으로 인하여 완전히 짓이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배신 그리고 자존심의 상처는 결국 죽음을 초래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가 무척 원망스러워 앙갚음하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 아내에 대한 사랑은 아내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국 클레브 왕자는 차라리 자신이 스스로 파멸하는 게 아내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심하게 병들어서 유명을 달리합니다.
8. 씁쓸한 결말, 그러나 이야기는 17세기의 상황 속에서 비롯한 것이다.: 남편이 죽자, 클레브 부인은 커다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미는 사랑하는 니무어 공작과 결혼할 수 있게 되었지만, 클레브 부인은 이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백이 남편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니무어 공작의 애타는 간청을 끝내 뿌리칩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행복은 다른 인간의 불행의 대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미는 니무어 공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클레브 왕자는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존한 유일한 남자입니다.” 뒤이어 클레브 부인은 시골로 내려가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작품은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클레르 부인의 처지에서 과연 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발설하는 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때로는 침묵이 더 낫지 않을까?”
“한 인간의 사랑이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 위배된다면, 우리는 사랑의 열정을 접고,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 순응해야 하는가? 체제 순응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이는 수단이 아닌가?” “자식도 없는 클레브 부인으로서 차라리 니무어 공작과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남편의 행복을 두 배로 누리는 일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은 현대적 시각에서 제기하는 물음일 수 있습니다.
9. 예수회의 교리 그리고 얀센주의의 교리 사이의 대립: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당시에는 별반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신교와 구교가 격렬하게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특정한 신앙의 교리를 놓고 여러 종파들이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회의 교리 그리고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가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교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회는 신의 은총과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상호 작용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비하면 얀센주의자들은 엄격하고 순결한 도덕을 추구하였습니다. 얀센주의 (혹은 장세니슴이라고 명명되기도 합니다.)에 의하면 죄를 지은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며, 신의 은총은 이 경우 오로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합니다. 클레르 부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얀센주의의 근업한 도덕의 법칙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클레브 부인의 마지막 결단에 대해 심리적 개인적 행복의 잣대를 들이댈 게 아니라, 당시에 엄격한 삶의 질서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종교적 계율을 일차적으로 접해야 할 것입니다.
10. 죄책감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클레브 부인』의 이야기는 가브리엘 드 기유라그Gabriel de Guilleragues의 『포르투갈 수녀의 일기Lettres portugaises』(1668)에서 다루어진 바와 같이, 불가능한 사랑으로 인한 깊은 회한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습으로부터 벗어난 사랑은 17세기의 절대왕정 체제를 고려할 때 어떤 재앙의 그림자 속에 차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지만, 이성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는 시대적 관련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데카르트는 사랑을 하나의 취약점으로 해석하였습니다. (Descartes Passions de l’ame.)
이를 고려한다면 여주인공의 사랑의 포기는 “플라토닉 러브에 입각한 의지와 이성의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와 미덕에 입각한 것도 아니고, 자아를 찾기 위한 결단도 아니며, 오히려 기껏해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 『클레브 부인』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표현에 의하면 이후의 시기에 “체념 소설의 시리즈를 낳게 했다.”고 비판 한 바 있습니다. (Luhmann: 12).
그러나 아베 프레보, 드 라클로 그리고 스탕달 등은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왜냐하면 줄거리는 차치하더라도, 작가가 사랑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 그리고 인간관계의 엉클림에 관해서 놀라운 필치로 묘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에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장 콕토 등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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