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근대영문헌

서로박: (1)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필자 (匹子) 2023. 11. 26. 10:06

1. 반역과 저항의 영국 작가, 조나탄 스위프트(1667 - 1745)의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히 여행기 내지는 유쾌한 모험담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작가의 근본적인 물음을 담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정치적 풍자를 담은 여행 소설로 이해된다. 『걸리버 여행기』의 원제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기적의 의사로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여러 척의 선장으로 활동한 레무엘 걸리버의 지상의 먼 나라의 여행”. 스위프트는 1713년에서 1714년 사이에 소설의 스케치를 런던의 잡지에 간행하였으며, 작품 일부를 1721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작품의 완결판은 1726년에 아일랜드에서 간행되었다. 작품은 놀라운 상상과 거침없는 이야기 전개는 독자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그 때문인지 『걸리버 여행기』는 서양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동화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예리하게 풍자하려고 하였다.

 

2. 작품은 짤막하게 요약된 수정판으로 발표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동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휘황찬란하게 사로잡았다. 그렇지만 작품의 완결판에 대한 논평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가령 사무엘 콜리지Samuel Coleridge,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윌리엄 새커리William Thackeray 등은 작가와 작중인물을 서로 동일시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냉혹하고도 사악한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비판하였다. 20세기에 이르러 조지 오웰George Orwell 역시 조나탄 스위프트의 정치적 태도, 이를테면 그의 보수적인 공화주의를 “반동적 지조”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3. 스위프트는 작품 속에 매우 다양한 문학적 전통을 반영하여,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통적 특징은 모든 것을 패러디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었다. 모든 것은 처음에는 일견 무미건조한 항해 일지처럼 서술되는 것 같다. 일반 선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문적 은어(隠語)가 가미되어 있는가 하면, 진리를 강권하는 듯은 문체는 스위프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찬탄을 받기도 했다. 물론 스위프트가 윌리엄 댐피어William Dampier의 항해일지 그리고 토머스 허버드Thomas Herbert의 여행기를 참조한 것은 사실이다. 전자는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을 항해하고 이를 자신의 일지에 기록하였고, 후자는, 플로리다 지역을 항해한 다음에 이에 대한 경험담을 동시대인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4. 그렇지만 작가는 이를 뛰어넘어서 아이러니한 문체로써 걸리버의 기상천외한 체험과 모험담을 독자에게 들려주고 있다. 당시에는 사라노 드 베르제락Cyrano de Bergerac의 여행기가 프랑스 전역에 널리 퍼졌는데, 스위프트는 이를 단순히 모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가는 전통적 유토피아 문헌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거리감을 취하고 있다. 이성적 자세로 극기하며 살아가거나, 스토아 철학적 방식의 자기 절제의 생활방식은 주인공 걸리버의 눈에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추상적 완전성으로 비칠 뿐이다. 걸리버는 순진하고 경박한 인간이다. 걸리버는 “경솔한gullible”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이름이라는 것은 그 자체 의미심장하다. 주어진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은 그 자체 엄청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주어진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은 그 자체 엄청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기괴한 모순을 뜻한다. 왜냐면 gull이란 바보, 현혹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면, “ver라는 단어는 진리 내지는 진실을 가리키는 veritas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5. 『걸리버 여행기』의 국역본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송낙헌 교수의 판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이며, 다른 하나는 유영 교수의 판본 (동서문화사 2012)이다. 두 개의 판본은 일장일단이 있다. 걸리버는 도합 네 차례 여행을 떠나는데, 내용상의 놀라움을 점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작품은 독자를 당혹시킬 정도의 상승 곡선을 보여준다. 네 번의 여행을 통해서 걸리버는 정상적 삶이 의심스럽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여행을 통해서 주인공은 이른바 인간학적 차원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따뜻한 정이라든가, 편안함 등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거칠고 편협한 시각으로 살아왔음을 감지한다. 말하자면 걸리버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음을 절감하게 된다.

 

5. 주인공은 첫 번째 키가 6인치도 되지 않는 소인국, 릴리푸트로 여행하고, 두 번째로 키가 교회 탑만큼 커다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인국, 브라브딩내그로 여행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가치가 그야말로 상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언젠가 철학자 버클리는 자신의 에세이 「환영의 새로운 이론에 관한 에세이Essay toward a New Theory of Vision」(170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모든 사물은 상대적으로 크고 작을 뿐이다.”

 

릴리푸트에서 주인공 걸리버는 모든 선박들을 두 손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지만, 브라브딩내그에서는 걸리버의 몸은 파리 떼와 쥐들보다 작다. 그는 달려드는 동물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 위하여 힘들게 두 손을 허우적거려야 한다. 릴리푸트에서 스스로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면서, 모든 정치적 관직을 다 차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만, 브라브딩내그에서는 스스로 위축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거인왕국의 왕은 “영국인들은 지상에서 기어 다니는 작은 버러지이며,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해로운 종이야,”하고 일갈한다. 이때 자그마한 버러지와 같은 걸리버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만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