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1)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보유'

필자 (匹子) 2023. 9. 25. 11:40

1. 디드로의 놀라운 책: 드니 디드로 (Denis Dederot, 1713 – 1784)의 철학적 대화의 기록인 『부갱빌 여행기 보유』만큼 후세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작품은 없습니다. 원 제목은 “부갱빌 여행기의 후기, 혹은 도덕적 이념을 여기에 걸맞지 않는 어떤 물리적 행동과 접목시키는 기이한 존재에 관한 A와 B 사이의 대화 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 ou Dialogue entre A. et B.”입니다. 디드로는 작품의 깊은 의미와 미래의 반향에 관해서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고는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가 죽은 뒤에 1796년 유작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당시는 왕당파가 자코뱅주의자들의 이념에 대항해서 프랑스 신문에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강하게 드러내던 시기였습니다. 말하자면 보수적 지조를 고수하는 사람이 적대자들이 순수하는 정치적 강령을 비난하기 위하여 자코뱅주의자들의 문헌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고나 할까요?

 

작품이 발표된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은 “저열한 본능”을 예찬하는 디드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예수회의 수사였던 편집자 한 사람은 자신의 발문에서 디드로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드니 디드로는 자코뱅주의자의 선동자, 체제개혁자 그리고 사회의 도덕을 더럽히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의 도덕적인 토대를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속에 제어할 수 없는 동물적 충동 내지 성적 욕망을 부추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디드로는 폭동을 선동하고, 도덕을 더럽히며, 혁명을 부추기는 원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디드로의 작품의 진가는 19세기 말에야 비로소 인정받게 됩니다. 리히텐베르거는 디드로의 작품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의 “고결한 야생”에 관한 일련의 작품 가운데 정점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2. 디드로의 삶 (1): 그렇다면 디드로가 과연 어떻게 살았기에, 19세기 유럽 사회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거시적 차원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을까요? 드니 디드로는 1713년 10월 5일에 프랑스 북서부의 지역 상판의 랑그르라는 소도시에서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요구대로 디드로는 종교적 경력을 쌓기 위해서 1723년부터 1728년까지 예수회 학교에서 다녔습니다. 디드로는 학업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능력을 드러내었으나, 엄격한 규칙과 학교의 훈육에 고통스러움을 느꼈습니다. 1726년에 그는 수사의 삭발을 받아들였습니다. (참고로 수사 삭발은 라틴어로 “Tonsur”라고 하는데, 머리카락을 둥근 띠로 남겨두고 다른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프란체스코 수사의 모습을 떠올리면 족할 것입니다.) 1728년에 그는 파리로 옮겨서 예수회 학교와 얀센주의를 표방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대학 수업을 준비하였습니다. 모든 의무조항 그리고 부자유는 그의 마음속에 강인한 저항 그리고 체제비판의 자세를 취하도록 하였습니다.

 

3. 디드로의 삶 (2): 1732년에 파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부터 디드로는 앙시앵레짐에 저항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는 신학자 내지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독교와 등을 지기 시작합니다. 1732년부터 1742년 사이에 그는 생계를 위하여 부유한 집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한 것 같습니다. 1733년에서 1735년 사이에 디드로는 변호사 서기로 일하면서, 때로는 원고료를 받고 연설문이라든가 설교 문장을 집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파리의 카페에 머물면서 반체제 인사들과 어울리곤 하였습니다. 어느 경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디드로는 방종한 여흥과 연애 행각을 일삼으며, 세인의 눈에 자주 띄었다고 합니다. 그는 주어진 모든 질서와 세속적인 풍습에 대해 저항적인 자세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1743년 천민 출신의 빨래 깁는 여자 아네뜨 샹피옹 Annette Champion와 결혼식을 올려 주위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가족의 결혼 풍습 그리고 봉건적 절대주의의 사회 질서에 저항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4. 디드로의 삶 (3): 그렇지만 디드로가 게으른 보헤미안의 삶을 지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디드로는 혼자 공부하여, 그리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상과 외국어를 혼자서 마스터했습니다. 그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예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은 것은 오랜 기간의 끝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40년대 초부터 그는 번역에 몰두하여 수많은 책을 프랑스어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1746년에 그의 『철학 사상 Pensées philosophiques』이 드디어 간행됩니다. 이 책에는 디드로의 철학 사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앙시앵레짐에 대한 강한 비판의 사고가 책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파리 의회는 바로 그해에 이 책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워 없앱니다. 뒤이어 간행된 책들이 검열에 통과되기는 했지만, 1749년에 발표된 문헌 「맹인들의 시력 활용을 위한 문헌 Lettre sur les aveugles dl’usage de ceux qui voient」으로 인하여 디드로는 감옥에 수감됩니다. 이 글에서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선천적인 맹인이 성공적인 수술 이후에도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도덕은 감각에 의존하며, 우주적으로 유효한 게 아니라, 개별 인간의 인지 행위와 관련된다.” 여기서 디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도덕이란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정해진 약속인데, 사람들은 오랜 관습 속에서 이를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