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근대불문헌

서로박: (2)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보유'

필자 (匹子) 2023. 9. 25. 11:44

(앞에서 계속됩니다.)

 

5. 디드로의 삶 (4): 디드로는 감옥에서 반성문을 집필하여 제출합니다. 거기에는 차제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가와 종교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그는 결코 절필을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글들은 외부로 발표되지 않았지만, 서랍 속에 쌓였습니다. 글의 일부는 친구들에게 회자되었으며, 달랑베르라는 이름으로 백과사전 전서의 형태 속에 교묘히 삽입되어 세인에게 알려졌습니다. 그의 백과사전의 문헌들은 철학자 볼테르의 합세 하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757년 루이 14세에 향한 다미엔의 암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책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백과사전은 35권으로 지속적으로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디드로가 작성한 수천 개의 작은 글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의 동료, 루이 드 조쿠어 Louis de Jaucourt는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17000 개의 작은 글을 집필하였으며, 달랑베르, 돌바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백과사전의 완성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드니 디드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5년 전인 시점인 1784년 7월 31일에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6. 자연법과 자유를 위한 디드로의 지조: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믿었습니다. 자연은 누구에게도 타인을 지배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디드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입법자의 길을 걷지 않으려고 결심했는데, 이를 말해주는 시가 남아 있습니다.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이 원칙은 낡았다./ 그건 폭군의 것일 뿐 내 것이 아니야./ 너희가 하나 되어라, 이게 나의 갈망이야, 난 자유를 사랑하니까./ 한 가지 고수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야.” 이 시에서는 디드로가 어째서 권력과 금력을 추종하지 않고, 철학과 문학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자유인,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인문학과 문학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3년 후에 디드로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공언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실정법을 지키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자연은 노예도 주인도 만들지 않았다./ 나는 법을 만들고 싶지도 지키고 싶지도 않아!/ 왕을 교살하는 동아줄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법의 손은 수사의 내장을 얼기설기 꿰맬 것이다.(Berneri: 186). “왕을 교살하는 동아줄이 아직 부족”하다는 은 디드로 자신이 처한 현실의 정황을 예리하게 꼬집은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디드로는 자연법의 정신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왕의 권한이 반드시 약화되리라는 점을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정확한 예견이었습니다. 교권과 왕권은 인민의 고유한 권한을 억압하는 두 가지 장애물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7. 계몽적 합리성과 감성: 그렇다면 우리는 디드로의 정치적 예술적 입장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요? 그렇지만 디드로는 교회를 냉혹할 정도로 지독하게 비판한 계몽주의자, 볼테르와는 전혀 다른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앙심이 투철하고, 무척 온유하며, 상상력이 풍부한 디드로는 무작정 계몽주의의 합리성을 추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경직되고 독단적인 철칙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동시대인들이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은 디드로의 견해에 의하면 계몽적 합리성 외에도 감성의 공간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은 디드로에 의하면 꿈, 광기 그리고 무의식적 영혼의 삶 등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디드로는 대부분의 프랑스의 경직된 사상가들과는 분명히 다른 입장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수학과 기하학에 비중을 둘 게 아니라, 생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디드로는 계몽적 인간본위주의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이상이 전인적 인간의 삶이라는 점을 분명히하면서 경험과 감각 그리고 직관의 측면을 도외시하지 말라고 동료 작가들에게 조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디드로와 독일의 레싱을 도외시한다면, 유럽의 계몽주의 문학은 활기 없는 딱딱한 예술 사조의 나락으로 빠져들었으리라고 말입니다.

 

8. 부갱빌은 누구인가? 이제 부갱빌 여행기에 관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프랑스의 여행가 루이 앙투안 부갱빌 (1729 – 1814)은 1766년에 범선을 타고 세계를 일주하였습니다. 그의 범선에는 식물학자와 천문학자 그리고 나사우 지겐 지방의 왕자도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부갱빌은 범선을 타고 약 3년 동안 항해했습니다. 그의 범선은 1768년 4월에 남태평양에 있는 타히티 섬에 도착했는데, 이로써 부갱빌은 타히티가 행정적으로 프랑스령이 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부갱빌은 타히티의 부족장의 아들, 아투루 Aoturu를 데리고 프랑스로 되돌아옵니다. 귀향길에 그는 하마터면 오스트레일리아를 구경할 뻔 했습니다. 항로를 조금만 남쪽으로 향했으면, 거대한 남쪽의 대륙을 조우할 수 있었는데, 날씨 등의 이유로 수마트라 자바 지역을 지나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스트레일리아는 1606년 네덜란드의 빌렘 얀츠 Willem Jansz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어쨌든 험난하고 힘든 여행에도 불구하고 부갱빌은 세계 일주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부갱빌이 거느렸던 50명의 선원가운데 목숨을 잃은 사람은 도합 일곱 명이었다고 합니다.

 

9. 『부갱빌 여행기 보유』의 집필 계기: 부갱빌은 1771년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 부갱빌 여행기를 집필하여 발표했습니다. 부갱빌은 여행기에서 자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세계 여행을 끝냈는가? 하는 사항, 특히 타히티에 관한 사항을 세밀하게 기술합니다. 타히티의 사람들은 온화한 기후를 바탕으로 힘들게 일하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절하고 순박하며, 물질문명에 때 묻지 않은 채 살아가는 원주민들이라고 했습니다. 부갱빌은 파리의 살롱에서 프랑스로 데리고 온 폴리네시아 사람인 아투루와 함께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뒤이어 1772년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갱빌 여행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갱빌 여행기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상당히 많은 독자층을 거느리게 됩니다. 프랑스 백과사전파의 작가인 드니 디드로가 작품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부갱빌 여행기』와 관련됩니다. 그는 부갱빌 여행기에 착안하여 서로 이질적인 문화와 성의 문제를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디드로의 놀랍고도 대담한 작품은 도합 네 개의 단락으로 완성되어,『문학 서한 Correspondance Littéraire』에 차례대로 발표되었습니다.

 

10. 집필의 의도: 디드로가 『부갱빌 여행기 부록』을 집필하게 된 의도는 두 가지 사항으로 요약됩니다. 물론 두 가지 사항은 일견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비칩니다만, 제각기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디드로는 새로운 나라를 발견하려는 선원들의 의식구조와 행동을 비판하려고 하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선원들은 그곳의 모든 물건과 재물 뿐 아니라, 폴리네시아 여성들과 아무런 조건 없이 육체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비록 디드로가 자본주의의 이윤추구의 속성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비판은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려는 유럽제국주의자들의 욕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제 아무리 무주물선점 (無主物先占)의 논리가 통용된다고 하더라도, 폴리네시아인들의 자유로운 성생활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히티 원주민들은 일견 원시적이지만, 유럽인들의 강제적 성윤리 없이 느긋하게 살아갑니다. 그들의 사회 형태를 서술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럽의 사회 형태가 결혼과 성의 문제에 있어서 얼마나 자연에 위배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역으로 숙고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남녀가 결혼을 통해서 성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질서를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드로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타히티 섬에서의 사랑의 삶을 일방적으로 예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3, 4, 5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