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후기 시민 사회의 유산을 모조리 거부하는 태도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에서 시민 사회의 문화를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더러 존재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20세기 예술에 대한 슈펭글러의 무조건적인 비난은 결국에 이르면 하나의 불합리한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가장 발전된 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는 시민 문화의 해체 현상 내지는 예술적으로 가능한 다양한 왜곡 현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해체라든가 일그러지거나 꿈틀거리는 왜곡은 저녁 그리고 아침, 다시 말해서 몰락과 개벽 사이에 변증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이러한 해체의 과정에서 결코 자신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고유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쟁은 언제나 사기 내지는 현혹이며, 게다가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바로 이러한 추락의 현상이야 말로 부르주아의 가장 자그마한 실수로서의 지루함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몰락과 파멸은 더 이상 거역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전환기의 특징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후기 시민사회의 몰락하는 세계의 지루함으로부터 어떠한 무엇도 채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기의 예술 작품에서 시대의 진리를 찾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것은 그 자체 문제점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전통적 예술에서 드러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서술 방식이다. 모든 것을 몽타주 식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시대의 갈등과 난제를 접하게 된다. 나중에 몇몇 표현주의자들이 초현실주의의 방식을 동원하면서 과거 지향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다룬 바 있는데, 여기서 아름다움은 경악과 전율의 시작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사항은 몰락의 시기의 예술에서 독창적으로 드러나는 무엇으로서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약 이러한 예술 작품에서 표현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벗겨내면, 우리는 그 속에서 부르주아의 통상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특징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오성을 향해 외치는 고유한 처절함이라고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후기 시민 사회의 예술 작품 속에는 어떤 재앙의 징후가 엿보이고 있다. 미래에 도래할 수 있는 끔찍한 재앙은 하나의 폭넓은 각도로 확장되어 있는데, 이는 19세기의 예술이라든가 이전의 낭만주의가 전혀 간파하지 못한 특징이다. 이는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끔찍한 가능성들을 더 이상 손을 놓고 관방할 수 없는 섬뜩한 징후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시민 사회의 합리주의 마지막에 출현한 커다란 예술적 외침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로써 철학의 영역은 이러한 사항을 하나의 유산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임무야 말로 철학의 새로운 출발이며, 전혀 달리 변모한 아폴론이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감이다. 철 지난 유행의 마력은 몰락 속의 퇴행에 해당한다. 이전 시대의 카바이드 불빛은 의외로 우리를 비밀스러울 정도로 차분하게 만든다. 부모 세대의 집안 분위기는 휘장과 무명 벨벳과 같은 아우라를 퍼져나가게 한다. 오늘날 생동하는 것들은 고대의 현실과 뒤엉켜서 묘한 대조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대의 원형의 상은 아주 멀리서 우리에게 간접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이는 문화적 유산의 소재가 역사 속에서 그룹을 형성하여 배열되어 있을 때 여지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 첫 번째 단계의 혁명적 상승, 두 번째 단계의 정태적 안정 그리고 세 번째 단계의 파괴 현상 등은 이러한 마지막 “퇴행” 속에서 마치 버림받은 것처럼 작용하고 있다. 왜냐면 여기서 예술적으로 발현되는 것은 놀랍게도 숨어 있는 무엇, 순간적으로 돌출하는 무엇 그리고 한 번도 문화로서 제대로 알려진 바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러하듯이 수많은 예술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놀라운 특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상승, 정태적 안정 그리고 파괴 현상 등은 휴식의 해결책 그리고 축조된 안정성을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전통적 예술 작품 한 가운데에서 기묘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합리적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의향을 지니면서 고대의 문화적 유산을 고찰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언가를 채택하며 그 기능적 변화를 도출해내는 과업에서 어떤 의혹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과업이 미래에 활용될 문화유산으로 적합할까 하는 물음과 관련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음의 사항이다. 즉 상기한 의혹이 시민 사회의 몰락의 시기에 출현한 가장 끔찍한 예술적 특징이 아니라는 사항 말이다. 물론 고대 원형의 유산이 담겨 있는 자료를 일차적으로 남용한다는 것은 가장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원형을 세밀하게 고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폭넓은 범위에서 미래에 도움이 되는 예술적 모티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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