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20전독문헌

박설호: (5) B. 트라벤의 망각된 독일 문학

필자 (匹子) 2023. 1. 2. 11:53

7. "백 장미 Die weisse Rose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첫 번째 만남은 16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황금에 혈안이 된 백인들의 배후에는 장검과 권총이 감추어져 있었고, 인디언들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듯한 손님들을 맞으려고 온갖 과일과 선물을 가지고 왔다.” (G. B. de Las Casas)

 

라스카사스의 "신대륙 발견과 인디언 학살의 역사" 이래로 유럽 문명과 인디언 문화 사이의 대립을 가장 정밀하게 다룬 작품으로서 우리는 "백 장미"를 들 수 있다. 트라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백장미"는 20년대 말에 집필되었다. 소설 형식의 측면에서 본 소설은 지금까지의 발표된 소설들과는 약간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소설적 화자로서 ‘나’, 제랄드 게일 Gerald Gale이 등장했는데, "백장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본 소설은 -부분적으로는 전지적 화자 全知的 話者가 등장하는- 이른바 전형적인 삼인칭 소설에 해당한다. 따라서 독자는 작가의 직접적인 견해라든가 독백 내지는 호소로부터 거리감을 취하며, 사건 및 갈등에 대해 보다 냉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소설 속에는 두 개의 거대한 세계가 서로 부딪치고 있다. 그 하나는 인디언들이 오래 전부터 지내온 유목민으로서의 폐쇄된 세계요, 다른 하나는 북아메리카로부터 팽창해 온 백인 자본가의 세계이다. 전자는 70가구들이 모여 사는 “백 장미 Rosa Blanca” 부족의 세계를, 후자는 모든 땅을 구매하려는 콘도르 정유 회사의 세계를 지칭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정유 회사가 계획하는) “검은 황금 Oro Negro”으로 불리는 석유 채굴의 작업이다.

 

백장미 부족은 하치엔다 Hazienda라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 백장미 부족을 대표하는, 이른바 족장, 야네츠 야신토는 땅 “하치엔다”가 인디언들의 정신적 어머니이자, 젖줄과 다름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실제로 그는 땅 문서에 서명한 적도 없다. 그는 아예 글을 쓸줄 모른다. 시 정부는 -지난 백 년 동안의 토지 사용의 사실을 근거로 하여- 몇 년 전에 하치엔다를 백장미 부족의 소유로 규정한 바 있다. 거대한 석유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콜린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치엔다를 “구매”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석유가 생산되는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백장미 부족의 땅 주위를 이미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네츠 하신토는 자신의 땅은 매매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땅은 영원해요. 돈은 그렇지 않아요.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땅을 돈과 바꿀 수 없답니다.” (S. 34).

두 개의 다른 세계의 만남과 병행하여, 소설적 내용 역시 두 가지 내용으로 병렬되어 있다. 그 하나는 백장미 부족의 삶과 그들의 자연 친화적 생활 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거대한 콘도르 정유 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콜린스의 이력 및 사생활이다. 황금에 눈이 먼 백인들 그리고 정유회사 사람들은 평화롭고 목가적으로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방해한다. 제 7장은 콜린스가 어떻게 집요하게 경력을 쌓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콜린스는 경제 위기 당시에 임금 삭감, 상여금, 보충 수당 등을 폐지하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킨다. 또한 그는 부하들을 시켜 노동자 개개인들의 노동 수행 능력을 은밀히 조사하게 한다 (S. 85 - 88). 그러나 작가는 콜린스를 무조건 사악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콜린스씨는 정직했다” (S. 172).

 

문제는 그가 부를 축적하여 많은 애인을 사귄다는 데 있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베티는 콜린스로부터 많은 돈을 요구한다. 콜린스는 여자들 때문에 경비 지출이 많다고 생각하며, 이를 아쉬워한다. (S. 123). 콜린스는 사업적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정하고 악랄한 자이지만, 유독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인간적 매력을 지닌 자로 묘사되고 있다. 데이비드 부스 David Buss에 의하면 남성이 (캐주얼 섹스를 위한 목적으로) 파트너를 유혹하는 일에서 첫 번째로 내세우는 것은 재산의 과시라고 한다. 그 다음은 충실성의 과시, 건장한 신체의 과시, 허세와 자신감, 외모 가꾸기 등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콜린스는 이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인물이다. 어쨌든 작가는 콜린스와 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장황하게 기술한다. 이는 지극히 의도적이다. 문제는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트라벤의 의도를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

 

“만약 빵 장수가 데모하여 승리하면, 구두 장수는 그만큼 더 비싼 빵값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면 빵 장수는 신발창을 그만큼 더 비싼 값으로 사야 한다. 이러한 체제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자본주의다. 어느 누구가 사악한 착취자, 어느 누구가 굶주리는 자 그리고 나머지 노동의 배반자 등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 속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S. 86)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의 욕구는 결국 인디언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콜린스는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집행인 한사람, 아브너 Abner를 고용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씨엔다 땅을 구매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아브너는 야네츠 야신토를 샌프란시스코로 초대한다. 아브너가 100만 달러를 제시하며, 땅을 팔 것을 요구하자, 야신토는 다시금 이를 거절한다. 아브너는 야밤에 국경 근처로 야씬토를 데리고 가서 곤봉으로 그를 때려 죽인다. 아브너와 그의 동료들은 역사 轢死로 위장시키려고, 도로변에 시체를 버린다. 그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어떤 누더기 차림의 남자, 추측컨대 뜨내기임에 틀림없는 멕시코 인이 국경 근처에서 야밤에 밀수 작업을 행하던 중 자동차에 치여 숨졌다.” (S. 200).

 

콘도르 정유 회사는 서류를 위조하여, 백장미 부족에게 40만 달러를 주고 하치엔다 땅을 사들인다. 백 방미 부족은 야신토가 글을 쓸 줄 모른다고 주장하며 계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그러자 콜린스는 페레스라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건을 무마시킨다. 이로써 다시금 서류상의 약속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구두 약속을 파기시키고 승리를 구가한다. 모든 혐의를 완벽하게 은폐하기 위해 콜린스는 하수인, 아브너에게 수당을 건네주며, 그를 파면시킨다. 나중에 콜린스는 비서를 통해 아브너의 소식을 접한다. 싱가포르의 카지노에서 아브너는 사기 당한 동료로부터 총살당한다.

 

8. 세 작품의 비교

 

잘 알려진 세계 문학에서, 특히 우리가 속한 문화계에서 트라벤만큼 인디언 어머니의 깊은 영혼의 고통을 문학적 형태로 표현한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도서 조합 구텐베르크 서평에서)

 

지금까지 논한 작품들을 서로 비교해 보기로 하자. 1. 소설적 관점상의 비교: 트라벤은 소설 구조의 실험에 그다지 커다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설의 구조는 자세히 고찰하면 소설 내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상기한 세 작품은 소설적 관점에서도 약간의 차이점을 지닌다. 예컨대 「정글속의 다리」는 자전적 체험을 반영한 1인칭 소설이다. 주인공은 제랄드 게일로서 작가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시에라마드레의 보물󰡕은 전형적인 3인칭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소설적 화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사건 및 대사는 객관적으로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작품, "백장미"역시 3인칭 소설이다. 그렇지만 소설적 화자는 부분적으로 모든 것을 서술하면서도, 등장인물을 비판하고, 때에 따라서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소설적 화자는 콜린스의 이중적 삶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소설 내에 발생하는 거대한 갈등 구조가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2. 주제상의 차이: 세 작품은 제각기 동화 同化, 변신 變身 그리고 대립 對立이라는 주제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정글속의 다리」에서의 주제는 한마디로 “주인공 ‘나’의 다른 문화권 속으로의 동화 同化”로 요약될 수 있다. 제랄드 게일은 다른 문화권에 서서히 발을 들여 놓으면서, 자신의 존재 그리고 정복자로서의 백인 존재를 서로 구분시킨다. 악어 사냥꾼이었던 그가 결국 이 직업을 포기하는 것도 상징적이다. 소설 속에서는 백인 문화는 자세하게 서술되지 않고 있지만, 인디언들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트라벤은 백인의 존재 자체가 인디언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독일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이에 비하면 "시에라마드레의 보물"의 소설적 소재는 인디언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황금을 찾아 헤매는 세 사람의 삶이 묘사되는데, 이들의 출신 성분은 “아메리카 정복자들 Conquistadoren”과는 다르다. 세 사람 모두 가난을 극복하려고 멕시코로 온 백인들이다. 문제는 세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이 변신한다는 데 있다. 가령 하워드와 커틴은 더 이상 금을 찾지 않고, 나름대로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이로써 트라벤은 돈과 행복이 서로 반비례 관계에 처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소설 전편을 통하여 인디언 공동체 및 그들의 세계관은 다만 간접적으로 거론될 뿐이다. 그러나 특히 의사로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하워드의 삶은 트라벤의 소설적 주제와 직결된다.

 

인디언 공동체 그리고 자본 확장을 지향하는 회사 사이의 대립에 관하여 "백 장미"만큼 훌륭하게 묘파한 소설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만큼 트라벤의 테마 설정은 신대륙의 문화권내의 갈등에 대해 정곡을 찌르고 있다. 나아가 소설적 화자는 자본가들의 부패상 그리고 그들의 불륜 등을 냉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백인과 인디언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오히려 백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재화에 대한 이기주의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설적 전개와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가지 취약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트라벤의 소설은 세부적 사항들을 장황하게 묘사되고 있다. 게다가 문체 역시 유장하고 사변적이다. 이로써 사건의 갈등은 대체로 후반부에 치우쳐 있다. 이러한 특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트라벤의 가상적 독자는 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에 살고 있는 독일 사람들이었다. 인디언 문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멕시코 독자에게는 불필요한) 설명을 첨가한 게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 유장한 문체가 도입된 것 같다.

 

나아가 트라벤은 소설적 흥미 내지는 스토리의 긴박감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트라벤 문학은 (잭 런던과 비교할 때) 오로지 대중적 관심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트라벤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의 기록 뿐 아니라, “사건을 야기하는 거대한 사회적 구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둘째, 작가는 소설 구도를 당시 시대적 배경과 병행해서 스토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물론 작가가 처한 시대적 배경과 소설적 현실이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가령 당시에 미국은 가끔 멕시코의 정치를 간섭했는데, 니카라과 내전 당시 아돌포 디아츠의 편을 들었다. 이에 비하면 프루타르코 엘리나스 카에스가 이끄는 멕시코 정부는 후안 사카사 당을 지지하였다. 말하자면 카에스는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으며, 미국의 석유 착취에 대한 위협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내용은 나중에 트라벤의 후기 소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