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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2) B. 트라벤의 망각된 독일 문학

필자 (匹子) 2022. 12. 27. 09:18

(앞에서 계속됩니다.)

 

3. 트라벤의 이력

 

“오 누가 한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뷔히너: 「레옹세와 레나」)

 

호적을 말소시키는 일 - 그것은 트라벤의 소설에서는 혁명가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나라, 멕시코는 트라벤에게는 증빙 서류에 관해 묻지 않는 땅이었다. 이곳에서는 이름, 직업, 출신지, 행선지 등을 묻는 게 거의 모욕적 질문으로 간주되니까 말이다. 1924년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트라벤은 스스로를 지금까지 끌고다녔던 마루트라는 이름을 팽개치고, 자신을 B. 트라벤 토르스반이라고 칭하였다. 언젠가 그는 토로했다. “나는 하나의 조국을 가지고 있지요, 선생님. 그것은 나 자신이랍니다.”

그렇다면 트라벤은 어떻게 유럽에서 살다가 도주했는가? 처음에 B. 트라벤/ 마루트는 주로 뒤셀도르프와 뮌헨에서 배우로 일하며, 잡지 「벽돌 태우는 자 Ziegelbrenner」를 혼자 간행한다. 그는 리챠드 모후트 Richard Maurhut라는 가명으로 중편 소설 「S. 양에게」를 뮌헨에서 발표한다. 트라벤/ 마루트는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꾀를 사용하기도 한다. 검열관에게 자신의 잡지를 “해롭지 않은 얇은 책자”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검열 도장이 찍힌 표지에다 다른 원고를 삽입시켜, 그것을 발표한다.

 

1919년 뮌헨 혁명이 발발했을 때, 레트 마루트는 혁명 정부의 주도 세력으로 활동한다. 그는 “혁명 재판소의 제정을 위한 준비 위원회”의 대변인으로 일한다. 5월 1일 마루트는 에프 장군의 백위군 Weißgardisten에 의해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마루트는 결코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야전 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송치된다. 바로 이곳에서 많은 노동 운동가, 혁명적 지조를 지닌 선원, 적위군, 스파르타쿠스 단원 등이 즉결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했던) 의용단 Freikorp의 장교 한명은 피고들을 마음대로 총살시키곤 하였던 것이다. 마루트 역시 형 집행 대기실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을 때 마루트는 순식간에 그곳을 탈출한다. 나중에 마루트는 여성으로 변장하여 뮌헨을 떠난다. 그 후에 마루트는 여러 가명을 사용하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1924년 마침내 멕시코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트라벤의 “자기 은폐 욕구” (Recknagel)가 상기한 체험 때문에 비롯한 것일까? 예컨대 트라벤은 작품 "트로차 Die Troza"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누군가 경찰 조서에서, 재판의 판결문에서, 감옥의 수인 명단에서 자신의 본명을 발견한다면, 그는 잘 알려진 이름 대신에 어떤 가명으로 도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분명히 트라벤은 자신의 끔찍한 경력 때문에 스스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평생 지속되었으며, 수많은 연구자들을 혼란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렇기에 트라벤의 정체를 정확히 유추한 사람은 바이에른 출신의 소설가이자 마루트/ 트라벤의 친구였던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 O. M. Graf, 비련의 무정부주의 작가, 에리히 뮈잠 Erich Mühsam에 국한되어 있었다.

 

4. 트라벤의 자기 은폐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사람들은 이력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트라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멕시코에서 B. 트라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자신의 작품이 유명세에 의해 평가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유독 예술 작품을 대할 때만이 예술가의 이름을 우선적으로 알려고 한다. 이와는 달리 백화점에서 슈퍼마켓에서 생필품 내지는 기호품을 구매할 때, 제작자의 이름이 회자 膾炙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컨대 가까운 미술관으로 가보라. 당신은 제목과 화가의 이름을 먼저 본 다음에 그림을 대하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제목과 화가의 이름을 외면하고, 오로지 그림만을 대하지 않는다. 이는 거의 습관적이다. 그것은 예술 산업의 권력을 파행적으로 확장시키게 하고, 거짓된 권위를 창출하는 데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이는 특히 주어진 사회가 폐쇄적일 경우 더욱 큰 영향을 끼친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예술가의 이름은 반드시 권위적 선입견을 조장시킨다. 가령 대가의 작품이 무조건 좋은 것처럼 보이고, 무명 작가의 작품은 무언가 하자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 작품은 처음부터 [마치 자연 과학의 명징한 해답과 같은 그러한] 하나의 엄밀한 척도에 의해 점수로 환산될 수 없지 않는가?

 

예술가의 권위적인 이름, 세 글자는 궁극적으로 예술의, 고독하고도 어려운 정도 正道를 배반하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적 권위는 자본주의의 예술 산업에 종사하는 권력과 거의 본능적으로 결착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특히 비평가들은 공정한 비평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가혹할 정도로 자기 성찰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비평가가 공명정대하게 일하려면, 그는 어떠한 서클에도 가입하지 말아야 하며, 결코 (경제적 도움을 주는) 단체를 위해 글을 써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문화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트라벤은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집단, 특정한 인종 그리고 특정 국가 등의 이해 관계 속에서 오해되지 않기를 갈망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트라벤에 의하면- 오직 예술가의 명성에서 비롯한 권위 의식이 사장되어야 하며, 모든 예술 감상자는 예술가 자체 내지는 예술가의 이력을 처음부터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트라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사람들은 이력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이는 그로 하여금 거짓말하도록 유혹하게 하니까. 만약 그가 어떤 몇몇 이유에서 자신의 진정한 이력이 사람들을 실망시키리라고 굳게 믿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의 문제에 국한시켜 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나의 이력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나의 인생 편력은 사적 私的인 것이며, 오직 나만이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 이기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이러한 생각은 나 자신의 일에 스스로 재판관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다. (..)”

트라벤의 견해에 의하면 창조적 인간에 관한 전기 傳記는 전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인식되지 않으면, 이는 인간이 무가치하거나, 작품이 무가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창조적인 인간은 오로지 작품이라는 유일한 전기를 지닐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는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과 (비판적 시각으로 고찰한) 자기 삶이 깡그리 이전되어 있다는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