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블로흐: 베르그송과 물질 (2)

필자 (匹子) 2022. 5. 30. 10:24

베르그송이 추구한 단순한 직관은 물질 이론의 모든 유형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실로 물질 이론은 대부분의 경우 인과율 내지 발생 기원적인 견해에 근거할 뿐 아니라, 나아가 경제적 물질적 역사관 내지 변증법적 물질 이론의 세계관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물질을 그런 식으로 고찰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정태적인 기억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질에서 어떠한 새로운 무엇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베르그송의 지론이었습니다. 물질은 베르그송에 의하면 스스로에 내재해 있는 모든 “팽창력tension”이 사라질 때까지 아래로 그냥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바깥으로 향하는 힘이 가해지면, 비스듬히 하강하여,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따뜻한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게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삶에 대한 독창적인 비약L'élan original de la vie”은 언제나 새롭게 작동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분석 작업은 물질이 원래 지니고 있는 하강하는 성향을 높이 상승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게 된다. Toutes nos analyses nous montrent dans la vie un effort pour remonter la pente que la matière descend.

 

베르그송은 물질 이론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물질을 마치 “용암 덩어리” 내지는 “육중한 돌덩어리”로 규정하였습니다. 그의 문헌 『창조적 진화』에는 생명의 중심부에서 터져 나오는 어떤 폭죽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어떤 거대한 꽃바구니와 같은 수많은 별들 가운데 마치 하나의 로켓과 같은 폭죽이 터져 나오는 양상을 언급하면 어떨까? 이러한 중심부는 감히 정의내리건대 사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적 특성이 용솟음쳐 나오는 지속성을 위해서 어떠한 것도 행하지 않는 생명, 행위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d’où les mondes jailliraient comme les fusées d’un immense bouquet, — pourvu toutefois que je ne donne pas ce centre pour une chose, mais pour une continuité de jaillissement.” 베르그송은 물질적 토대가 단순히 어떤 폭죽의 용암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에는 더 이상 물질의 어떤 긍정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베르그송은 이러한 “무가치한 잔여물”로부터 모든 생명체의 자연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무기질 내지 생명체의 자연이야 말로 하나의 규칙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차단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양으로 형성되어 있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베르그송은 어떤 독자적인 생명력을 강조할 뿐 아니라, 어떤 독립적인 영혼의 삶 또한 중시합니다. 비록 영혼의 삶이 결코 어떤 필연적인, 혹은 아무런 빈틈 없는 해부학적 바탕을 지니지 않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베르그송에 의하면 영혼을 간직하지도 않고, 그것을 생산해내는 주체도 아니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두뇌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영혼은 물질적인 자극을 받아들이고, 행위를 통해 물질을 포착하는데,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뇌라는 것입니다.

 

베르그송의 이러한 사고는 이른바 영혼에게 독자적인 기능을 부여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영혼이란 두 명의 고전 철학자에 의하면 육체의 엔텔레케이아로서 필연적으로 물질에 결착되어 있는 무엇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부속되어 있는 형태forma inhaerens”에 해당하지, 결코 천상의 존재, 즉 “구분되어 있는 형태forma separate”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셸링 역시 이 점에 관해서 조직체 내지 생명체의 우선권 그리고 비조직적 개체에 관해서 지엽적으로 논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셸링의 이러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셸링이 영혼을 논하면서, 이른바 생명력을 지니지 않은, 죽은 물질을 철저하게 영혼으로부터 배제시켰더라면, 베르그송은 영혼에 관한 셸링의 주장을 중요한 관건으로 수용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쇼펜하우어에게서 많은 것을 차용했습니다. 폭죽의 비약과 관련하여 쇼펜하우어는 셸링과는 달리 인간의 욕구를 핵심적 관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이 주창한 “생명의 도약”은 엄밀히 말해 그 특성과 방향을 고려할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입장은 삶을 예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대비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르그송은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의 관점에 입각하여” 인간의 의식을 최상의 생명력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잠은 더 이상 의지와 관련되지 않고, 오히려 물질에 연계되어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베르그송은 생명이야 말로 가장 고귀한 의식이며, 물질은 생명의 이른바 생명의 “탈-긴장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물질은 그 강도에 있어서 생명과 대립되고 있습니다.

 

생명의 도약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명의 의지와 구분되는 결정적 사항은 오로지 삶에 대한 예찬 그리고 디오니소스의 정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송은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새로운 무엇의 어떤 창조적인 순간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베르그송의 독창성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무엇에 대한 긍정적인 의향에서 그대로 발견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지극히 정태적인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주어진 현실에서 빠져나온 어떤 정신을 가리키거나 어떤 수학적 진리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격정적이며, 동시에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엄밀히 따지면 통상적 의미에 있어서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이에 반해 베르그송의 도약은 놀라움 그 자체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방향을 얼마든지 바꿀 수 었는 순간의 개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