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세계 의지의 모든 물질적 출현을 객관화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러한 출현이 보편적인 종과 유형에서 발생하는 한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여기서 말하는 의지의 객관화란 -적어도 그것이 예술의 대상 내지 객체인 한에서는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마치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객관화가 설정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더욱이 인과율을 벗어난 이러한 계층 속에서 이전에 언급되고 용인되었던 물질이 다시금 출현하는 것은 그 자체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물질은 바로 여기서 “이념 그리고 개별성의 원칙principio individuationis 사이의 연결고리인데, 이것은 개인의 인식의 형태이거나, 토대에 관한 명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자신의 가장 보편적인, 다시 말해 기계론적인 질적 특성을 추적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의지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가장 미약한 객관성을 밝혀내려고 할 뿐입니다. 여기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이념들은 이를테면 무게, 응집력, 경직성, 유동성 그리고 빛에 대항하는 반작용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은 이와 동시에 객관화라는 상승 과정에서, 다시 말해서 생명체의 조직적인 단계, 특히 동물과 인간의 영역 속으로 들어서면서 하나의 새로운 직책을 획득하게 됩니다. 이때 물질은 지금까지 견지했던 의지의 단순한 가시적인 특성을 중단하고, 그 자체 의지의 재료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물질은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야말로 막강한 의지를 지닌 객관화된 존재로서 무언가를 먹어치우는 동물로 화하고 있습니다. 의지는 보다 미약한 의지를 발기발기 찢어서 목구멍으로 삼키는 짐승,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구가하는 동물로 비유될 정도입니다. 수많은 육체를 섭취한 물질은 모든 객관화된 의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전율을 느낄만한 단계 내지 등급이 자리합니다.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늑대는 거북이들의 내장을 모조리 파먹고, 그 다음에 호랑이는 거친 늑대들을 잡아먹습니다.
물론 굴복당한 물질은 막강한 승리자 곁에서 죽어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승리자는 그야말로 힘든 대가를 치른 승리를 구가하며 굴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로써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의 어떤 놀라운 단계가 축조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더 명징하게 나타나는 것은 의지의 공허함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의지 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늑대가 양을 찢어서 자신의 먹이로 삼키듯이, 모든 물질은 그러한 방식으로 찢겨나가게 됩니다.
하나의 의지가 이런 식으로 여러 개로 찢어지게 되듯이 물질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어떤 배가된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과 의지는 궁극적으로 서로의 간격을 좁혀나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물질이라는 형체를 통해서 찢어먹는 것은 바로 의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양성 그리고 서로 이질적인 개별화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양하게 변하지도 않고, 이질적인 개별화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이는 객관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현혹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의지는 항상 동일한 의지로 남아 있습니다. 물질은 이전에는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리고 의지로서의 세계 사이의 높은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물질은 어떤 일원성, 어떤 전체성, 어떤 실체 그리고 어떤 파괴될 수 없는 특성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은 쇼펜하우어의 경우 한결같이 “의지의 어떤 가시적 특성”과 공통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은 이러한 위치에서는 물 자체와 동일시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어떤 내용상의 공통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언급된 다소 형식적인 여러 가지의 공통성에 첨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상의 공통점이 물질을 의지와 유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물질과 의지는 동일한 것들은 아니지만, 거의 같은 것들입니다. 또한 내용상의 공통점은 의지의 가시성 그리고 가시성의 내용 사이의 장애물을 떨치도록 작용합니다. 쇼펜하우어는 물질을 언제나 지속적으로 객관화의 행위를 자극하는 터전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모든 것을 먹어치워서 거대한 파편의 산을 이루는 물질은 객관화 작업의 받침대라고 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의지 그리고 수없이 삼켜진 물질은 형이상학적 핵심적 관건을 염두에 둘 때 똑 같은 무엇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과 의지는 동일하며 동질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후기 작품인 『여록과 보유 Parerga und Paralipomena』(1851)에서 아무런 꾸밈없이 그야말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습니다. “의지는 물 자체를 가리키는데, 모든 존재의 공통되는 소재이며, 나아가 모든 사물에 공통적으로 깃들어 있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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