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블로흐: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의 물질 이론

필자 (匹子) 2022. 11. 5. 09:56

그런데 과거 사람들은 운동보다도 멈춤에 관해서 강력하고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그리하여 멈춤은 쉽사리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장되었다. 멈추어 있는 존재는 이루어진 무엇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본원적 실체로 이해되었다. 다시 말해 실체는 생동하지 않으며, 어떠한 날씨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엘레아 학파들은 다만 스스로 생명으로 치장해 있는, 어떤 죽음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고는 비밀스러운 광채에 의해서 번득였다. 엘레아 철학자들은 늙은 다음에 찾아오는 죽음의 상에 대해 반대했다. 그들은 “가득 찬 무엇 πλέον”을 몹시 애호하며, 공허함을 거부하고 혐오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엘레아 학파는 무엇보다도 완전한 돌처럼 존재하기를 갈구하였으며, 정지 그리고 변하지 않는 상태에 동참하려는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죽음의 정태적인 상을 동경하며, 그것을 영생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를 갈구하는 태도는 이집트의 문화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비-존재는 세상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공허한 공간과 동일시했다. 전적으로 빽빽한 개체에 해당하는 “많음 πλέον”이라는 개념 속에는 어떠한 사이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이 공간을 지나칠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는 전혀 주어져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득 찬 존재 Vollen”로서의 화강암은 운동, 개별성 그리고 다양함 등에 대해 어떠한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돌은 그 자체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사라지지도 움직이지도 않으며, 나누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휴지의 현상, 즉 멈춤을 어떤 상대적 균형으로써 해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이와는 반대로 움직임이라는 현상을 도저히 구명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화강암과 같은 존재 속에다 주관적 관점에서의 잡초와 같은 상을 편입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두 가지의 방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불(火)로부터 제반 사물로 내려가는 길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사물로부터 불(火)로 향해서 올라가는 길이었다. 경직성 내지는 냉혹하게 변화되는 경우는 최소한 지하 명부로 추락한 인간들, 즉 죽은 자들에게 해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논은 운동의 불가능성을 하나의 증명 사항으로 내세운 바 있다. 시간과 공간을 불연속적으로 세분화한다면, 운동은 얼마든지 수많은 정지 상태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헤라클레이토스가 제논의 유명한 증명 사항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그는 나중에 갈릴레이의 수학,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분학의 특징을 얼마든지 예견했을 것이다. 제논의 경우 “하나는 전부다.Ἓν καὶ Πãν”라는 의미를 고수하다가, 경직성을 철학의 방법론으로 만들어내었다. 이로써 제논은 “운동은 정지다.”라는 아포리아의 역설을 만들어내었는데, 이로써 정지한 경직된 상태를 절대적인 무엇으로 단언하면서, 우리를 숨 막히게 만든 셈이다. 이로써 형성된 것은 변증법에 대항하는 반-변증법이었다. 다시 말해서 제논의 역설은 어떠한 모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추적하던 시간의 가득 채움은 공간의 가장 빽빽한 가득 채움으로 대치되고 말았다. 생명의 움직임 대신에 죽음의 정지 상태가 남게 된다. 이로써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보다는 엘레아 학파 사람들의 주장을 더욱 중시하게 된다. 전자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모를 추적해나갔다면, 후자는 공간 속에서 영원히 원을 형성하면서 충만해지는 정지 상태를 강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모순을 통한 움직임의 투쟁을 중시한 데 비하면, 엘레아 학파는 불가능한 모순으로 인한 정지 상태의 평화를 강조한 셈이다. 마지막에 승리를 구가한 자는 원구의 휴지(休止)를 내세우는 유일한 존재, 제우스였다. 엘레아 학파들은 원구 속에서 휴식하는 신 제우스를 위해서 한계 속의 완전성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성스러운 수학과 근접해 있다. 그렇지만 경직된 동일성이 수학적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하나는 전부다.Ἓν καὶ Πãν”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오로지 일원성 외에는 어떠한 숫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 완전히 꺼져버린 척도는 어떠한 기준도 크기도 알려주지 못한다. 완전히 사망하지 않은 (약간의 움직임을 담은) 휴지만이 수학적 법칙으로 발전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수학적 사고는 피타고라스 (역사적으로 필롤라오스와 그의 학교)에 의해서 태동하였다. 하나는 여기서 더 이상 “하나이자 모든 것”이라고 파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일원적인 무엇은 결코 무조건 최상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등급은 여기서 흔들리고 있다. 하나는 처음에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존재의 정상에 위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 다음에 이어지는 숫자가 오히려 더욱 발전된 것이며 더욱더 완전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롤라오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다. 나중에 첨가되는 하나의 존재는 원구의 한복판에 위치하는데, 그것은 ‘아궁이 ὴ έστια’라고 명명된다.” 그런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간다. “일곱 개의 수는 한 번도 어머니가 되어본 적이 없는 처녀, 아테네-니케와 매우 흡사하다. (...) 왜나면 그것은 모든 존재를 안내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특정한 곳에 머무는 불변하는 신은 자기 자신이 모든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며 자신을 다른 것들과 구분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존재는 서로 곡선과 직선으로 뒤엉켜 있다. “하나”는 무엇보다도 짝수 그리고 홀수와 혼합되어 있는데, 이어지는 숫자에 의해서 비로소 10까지 차례로 펼쳐질 수 있다. 그래서 필롤라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는 모든 것을 어떤 목표로 인도하고, 모든 것에 작용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신적인, 천국의 그리고 인간 삶의 근원이며,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다.”

 

“하나”는 자신의 곧음과 휘어짐을 분석하면서 짝수와 홀수라는 숫자로 배열하는데, 이것들은 다시금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한다. 이로써 “하나”는 휴식의 곁에 움직임(홀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은 그 자체 조화로움이다. 그 범위는 여러 가지 음정의 관계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가령 옥타브 (1: 2), 4도 음정 (3: 4), 5도 음정 (2: 3)을 예로 들 수 있다. 필롤라오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같은 유형들과 근친한 것들은 굳이 조화로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유형, 이질적인 것들 그리고 상반되는 것들은 세계의 질서에 따르고 이에 종속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서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종(種)의 개념이 처음부터 생략되어 있다. 그렇기에 개별성과 보편성의 문제는 여기서 너무 동떨어져 있으므로,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하는 어떤 사람은 심지어 모든 사물의 본질을 하나의 숫자로써 표현하려 하기도 했다.

 

필롤라오스의 경우 모든 고유한 형식적 개념, 다시 말해서 내용이 빈약한 개념들은 처음부터 빠져 있다. 이는 플라톤에게서도 엿보이는 특징이다. 형식적 개념 내지는 내용이 빈약한 개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비로소 기초적 의미에서의 카테고리로 규정된 바 있다. 그 대신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는 놀라운 기본 개념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대립을 결집한 첨예함 내지는 직선과 곡선으로 전개되는 조화로움이다. 불안정 상태, 즉 운동은 인간의 감각적 육체와 관련되는데, 하나의 바르지 못함 내지는 굴곡의 선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에 반해 안정, 즉 휴지(休止)는 세계를 다스리는 논리적인 신과 관련되는데, 하나의 똑바름 내지는 직선으로 이해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유형적 증오심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는데,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오로지 신들의 소유물의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화로움은 어떤 갈등의 화살을 끌어당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갈등이란 운동 그리고 휴식, 왼쪽 그리고 오른쪽, 곡선 그리고 직선, 다양성 그리고 일원성, 여성성 그리고 남성성, 어두움과 밝음, 무제한성 그리고 제한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질서의 파토스는 숫자보다는 수의 조화로움 속에서 더욱 강하게 출현하고 있다. 질서야말로 더욱더 고상한 정지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는 운동 그리고 정지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무엇이다. 수의 배열에서 더욱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수는 무엇보다도 직선에 해당하는 휴지의 숫자다. 변하는 존재들은 “달 아래의” 세상의 영역에 해당하는 데 비해서, 불변하는 존재들은 하늘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를 고려할 때 조화로운 연결은 언제나 하늘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순수한 죽음의 마력을 지닌 이집트 문화에 이끌렸는데, 이는 바빌로니아에서 추적한 천구의 조화로움에 관한 사고를 완전히 회피하고 말았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천문학 연구를 통해서 천체가 놀라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바 있다. 천제는 신들과 같이 가만히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면서 영원히 원을 그리며 움직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