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브레멘"

필자 (匹子) 2023. 4. 2. 18:12

브레멘

박설호

 

가을 저녁 강가에는

오리 떼 그루잠 자고

떡갈나무 가지의 상고대 다가오는 추위에도

흐물흐물 녹는 디도의 흐느끼는 눈물이라면 *

저 멀리 계신 부모님

정화수가 보이지

 

베저 강 둥거 호수 **

얼음 사이 덧물이 흘러

새띠기들 갈 길 바쁜 행려자의 소매를 잡고

친구로 괴자고 다소곳이 애원하고 있을 때

푸드득 갈까마귀도

푸접 떨고 있었지

 

브레멘 광장에서

올려다 본 당나귀

황구 고양이 수탉 모두 힘없는 늙은이 모임 ***

약한 자의 저항 어떠한 힘인지 보여준다면

화음은 길손의 마음

벅차게 만들었지

 

바로 여기 반거충이

잠시만 머물지만

데이지 꽃 그 향기 가슴속 깊이 사랑하기에

함께 아우르자는 디도의 말없는 고백이라면

순간의 설렘 속에서

기쁨은 영원했지

 

 

* 디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카르타고의 왕녀. 아이네이스가 멀리 떠나자, 그미는 이별의 고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 둥거 호수는 베저 강가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조류 보호구역이다.

***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동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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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거 호수

브레멘 음악대

브레머하펜

 

위의 작품은 약 35년 전에 집필한 나의 미발표 시조시입니다. 1981년에 한반도를 떠나 거의 10년 동안 유럽에서 버티고 살았습니다. 일시 귀국도 하지 않았습니다. 1982년에 처음으로 브레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망명 신청이냐, 학위 취득이냐를 놓고 고민할 때 잠시 찾아간 곳이 바로 자유 도시였습니다. 두 번째 브레멘 체류는 기억하건대 1986년인 것 같습니다. 근처의 브레머하펜Bremerhaven으로 가서 맛있는 연어 요리를 먹었던 기억이 솟아오릅니다.

 

1996년에 세 번째로 브레멘을 찾았는데, 동독문학의 전문가, 볼프강 에메리히 교수님 Prof. Wolfgang Emmerich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에메리히 교수님의 도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유 도시 브레멘. 당시에 나는 물질적으로 매우 빈한했지만, 마음과 두뇌만큼은 만화경 속처럼 휘황찬란하였습니다.

 

그곳의 자유로운 정서적 후광을 마음껏 체득할 수 있었으니까요. 선량한 다소니들도 사귈 수 있었는데, 지금도 그들의 인간적 후덕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의 흐릿하듯 명료하듯 가물거리는 기억이 나로 하여금 작품 한 편을 남기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