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나보코브의 "롤리타" (3)

필자 (匹子) 2021. 12. 30. 11:17

 

10. 험버트 험버트, 강박증, 편집망상증 환자: 주인공 험버트는 -나보코프 스스로 어느 인터뷰에서 술회한 바 있듯이- 허영심이 많고, 집요한 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강박증 환자 내지 편집망상증 환자인지 모릅니다. 나이 어린 소녀, 애너벨 리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도저히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가능하게 만들려고 하는 끈덕진 마음은 그 자체 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단순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며 소유욕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험버트 역시 이를 잘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의 이러한 사고를 도저히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심리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샬롯이 죽지 않고, 끝까지 자신과 롤리타의 관계를 방해했더라면, 그는 샬롯을 살해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바람둥이의 면모를 찾지만, 독자들 가운데 의외로 소수가 험버트의 집착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끝없이 사랑을 쟁취하려는 남성적인 가련한 (?) 욕구가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공의 내면에 관한 나보코프의 묘사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쌍한 우리의 주인공은 롤리타를 그냥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11. 롤리타, 1950년대 평범한 미국 소녀, 주인공에 의해 요정으로 미화되다: 사람들은 롤리타를 바라보는 험버트의 관점 묘사에 대해서 찬사를 금치 않았습니다. 롤리타는 주인공이 떠올린 상상의 인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미는 이를테면 사악한 영혼으로서의 요정으로 묘사됩니다. 그미의 실제 이름은 돌로레스 해즈입니다. 친구들은 그미를 “돌리” 혹은 “로”라고 부르곤 합니다. 작품은 그미의 신체부분, 말씨, 태도 그리고 그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들을 속속들이 묘사하는데, 롤리타는 50년대에 살던 10대 소녀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험버트가 세심하고 예민하며 쉽게 상처 입는 데 비하면, 실제의 롤리타는 다소 거칠고, 사람들에 대해서 냉담한 성격을 드러내곤 합니다. 어쩌면 롤리타가 거칠게 행동하는 까닭은 여성 특유의 보호본능 내지 의붓아버지 험버트의 세계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반항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롤리타는 그야말로 평범한 소녀인데, 험버트의 환상 속에서 신비롭게 미화된 요정의 존재로 각인되고 있습니다. 그미가 호기심 많고, 여리며, 선량하고, 성적 도취를 즐긴다고 하는데, 이는 오로지 험버트의 상상 속의 롤리타의 상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롤리타가 처음부터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갈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그미에게 문제로 작용한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갈등 내지 고민이 아니라, 근친상간에 대한 혼란스러움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미는 험버트가 어머니와 결혼한 남자이며, 사랑을 나누기에는 나이 차이가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하나의 체스 게임이라고 여겼다. 그의 소설은 체스의 음직임 대로 치밀한 기승전결로 이루어져 있다.

 

12. 밖에서 제 3자로서 논평하기는 쉬운 법이다. 만일 우리가 험버트의 인두겁을 쓰고 세상을 산다면, 쉽사리 자신의 심리적 하자를 꿰뚫을 수 있을까? 친애하는 N, 나보코프는 자신의 소설을 언제나 체스 놀이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사실 험버트의 사고와 내적 감정은 결국 필연적인 과정을 거쳐서 사건 속에서 기승전결 식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죄의 근원을 찾으려고 할 때도 이러한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극의 원인은 한마디로 험버트의 왜곡된 심리상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어진 현실에 애너벨리와 같은 소녀의 요정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심리 치료를 받아서 병적인 강박관념을 떨쳐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험버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치 사랑의 신기를 찾아다니는 사냥꾼처럼 그렇게 롤리타의 상에 집착하였습니다. 이러한 강박적 집착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그는 롤리타로부터 도저히 멀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해즈의 소파에서 행하는 주인공의 거친 수음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도 그가 얼마나 실제 현실의 돌로레스를 인지하지 않고, 하나의 가상적인 요정의 상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강박적 집착은 결국에는 사고사와 살인극을 불러옵니다.

 

소설의 과정은 마치 체스 게임의 과정이 그러하듯이 필연적인 결말로 치닫습니다. 롤리타의 어머니인 샬롯 해즈의 죽음이 나중에 극작가에 대한 살인 행위의 판박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경우 사고사와 살인극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모든 사건이 결국 애너벨리의 환영을 추적하여 그미를 소유하고 말리라는 주인공의 병적인 집착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롤리타는 그저 주변 인물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미가 인간의 내면의 금기를 깨뜨리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험버트가 그미를 그렇게 잘못 고찰한다는 바로 이러한 편집적 착오에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