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 이 시대의 유산 (2)

필자 (匹子) 2021. 9. 13. 09:34

유산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나의 책 『이 시대의 유산』에서 하나의 중요한 관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책에서 나는 유산의 문제를 네 개의 작은 시기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우선 제시되는 것은 분산의 경향입니다. 직장 고용인들의 산만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세상은 우스꽝스럽고 긴장감 넘치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요. 이러한 문화는 특히 영화에서 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붉은 감정의 덩어리가 출몰합니다. 혁명의 광채 내지 이른 광채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침 여명, 혹은 저녁의 황혼이 도래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바로 이러한 분위기는 1920년대 베를린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가 바로 분산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화적으로 계승될 수 있을까? 단순한 속임수 내지 현혹이 아닌, 어떤 다른 무엇이 나타나서, 현재의 시대정신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두 번째로 등장하는 특성은 이보다도 더 강력하게 출현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도취”라고 명명됩니다. 도취는 국가 사회주의의 슬로건, 다시 말해서 나치즘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마력에 매료되는 열광의 시기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도취와 열광은 사람들로 하여금 냉정함을 상실하게 하여 현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깊이 숙고하지 않도록 작용합니다. 나치의 집권 시기는 한마디로 힘들게 고초를 겪는 사람들이 마구 뒤섞인 비동시성의 시대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시기에는 동시적 사고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시대정신을 뛰어넘으려는 비동시적 특성 역시 상당 부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동시성을 초월하려는 사람들이지요. (말하자면 같은 시기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인식의 토대가 자리한 셈입니다.) 비동시적인 사람들은 예컨대 농어촌에서 농사짓거나 고기를 잡는 농부와 어부, 작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가령 한 곳에서 정착해서 살아가는 농부와 어부를 고찰해 보세요. 이들은 20세기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의식 구조는 약 백 년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낙후해 있습니다.

 

농부와 어부 그리고 시골의 소시민들의 의식 구조가 비동시적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여전히 오래 전부터 존재한 어떤 하부 구조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고찰할 때 그렇습니다. 가령 농부들은 오래 전부터 쟁기를 사용했습니다. 영농을 촉진시킬 수 있는 트랙터는 아직도 모든 곳에 동시적으로 보급되지 않았지요. 가옥,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농부들의 이데올로기, 자연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세요. 이는 오래 전부터 농부들의 의식 구조를 형성시켜 왔습니다. 비와 가뭄, 천둥 번개 등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농부들을 고찰해 보세요. 이들의 자연 친화적인 삶은 자연 의존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소극적이며, 자연 의존적 반응이야 말로 바로 농부들의 생활 방식의 기본적 전제조건들입니다. 그들은 비동시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동시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단번에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이들과 대화를 나누려면,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들의 이해를 촉구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다른 방식의 선동 선전의 전략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안이 그들의 삶에 직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농부와 어부 그리고 소시민들은 어떤 진보적 정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어지는 동시적인 시기에는 거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급 차이와 계급 갈등을 의식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언급했듯이 동시성을 초월하려는 초시대적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도취가 아니라, 몽타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폭풍 전야의 특성 그리고 실험이 우세하게 나타나지요. 그렇다고 어떤 다른 세계에 관한 가시적인 계급적 관심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실험적 방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이라든가 마르크스의 사상 그리고 의식에 관해서 처음으로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계급에 관한 관심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표현주의는 바로 이러한 시기의 예술에 해당합니다. 유럽 외적인 문화권 문제점의 문제점도 여기에 속하지요. 여기에는 아무런 도취가 드러나지 않아요. 중국이 거대한 지평 속에서 출현하고, 농촌의 예술은 어떤 새로운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표현주의 회화 가운데 푸른 기사가 나타나고, 나중에는 쉬르리얼리즘의 예술이 모습을 드러내지요. 말하자면 몽타주 예술이 본격적으로 출현합니다. 말하자면 때로는 동시적이고, 때로는 동시성을 뛰어넘는 사물들이 거대 부르주아의 살롱 문화에서 발견되곤 합니다. 그뿐 아니라 거리 문화, 경악의 문화, 다시 말해 놀라움의 태도, 기이할 정도로 당혹감을 안겨주는 사물들 또한 등장하게 되지요. 소시민들은 평소에 이러한 사물에 대해 거부감을 느낍니다만, 이러한 것들은 속물적 경향과 함께 새로운 예술적 소재로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시대의 강력한 미덕에 비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악덕이라는 반대급부로 나타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껄끄러운 유산이 다양한 사회 계층 속에서 기이하게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술이 어떻게 수용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에 공산당이 수행한 일련의 주요 과업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니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공산당이 문화적 영역에서 어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간과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공산당 사람들은 나치들이 채택한 열광적 감정과 도취의 태도를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판타지 속에 포착되는 문화적 몽타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은 그들의 전략을 마련하여 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오로지 한 가지 언어만을 고집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계층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설득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도취, 몽타주 그리고 표현주의 등과 같은 개념은 독일 공산당의 운동에서 충분히 활용되어야 마땅했습니다. 만약 공산당이 이러한 개념들을 활용했다면, 수많은 계층 사람들의 언어를 바꾸고 그들의 사고를 진보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나치가 우리에게서 이러한 가능성을 훔쳐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거대한 혁명적 전통을 담고 있는 제반 자양을 포기하는 동안에, 나치들은 이러한 자양으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스파르타쿠스는 무산 계급이 활용해야 하는 문화적 유산의 인물인데도, 나치들이 그를 가로채고 말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제 3제국”은 원래 13세기에 살았던 조아키노 디 피오레의 사상에서 유래하는 명칭입니다. 이것아야 말로 유럽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혁명적 가르침이었지요. 독일의 작가 레싱은 이를 작품에 인용한 바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등장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보수주의 혁명가, 묄러 반 덴 브룩은 도스토옙스키를 새롭게 번역하였으며, 자신의 책 『제 3제국』을 간행하였습니다. 하이네 역시 이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입센의 극작품에서도 이 단어는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낙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치는 3이라는 숫자를 수용하여 원래의 의미를 천박하게 변화시키고 말았지요.

 

첫 번째 제국은 나치의 견해에 의하면 독일의 신성 로마제국이고, 두 번째 제국은 빌헬름 황제의 국가이며, 세 번째 제국은 히틀러 국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국가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 번째 제국”이라고 명명됩니다. 이는 놀라울 정도로 선동적인 영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조아키노에서 레싱 그리고 하이네를 거쳐 입센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이네는 결코 신화를 예찬하는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계몽주의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치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그야말로 의심스러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