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렌츠의 가정교사 (3)

필자 (匹子) 2021. 10. 4. 08:57

나중에 구스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미는 어느 숲속에 숨어 있다가 눈먼 거지, 마르테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르테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로이퍼의 아기를 출산합니다. 몇 달 후 구스첸은 자신의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마르테의 집을 몰래 빠져나와 이웃마을로 향합니다. 다른 한편 폰 베르크 소령은 공립학교에 숨어지내는 로이퍼를 수소문하여 끝내 찾아냅니다. 그는 로이퍼에게 다가가 사정없이 총격을 가합니다. 심한 총격에도 불구하고 로이퍼는 다행히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폰 베르크 소령은 로이퍼가 구스첸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한 다음에, 그곳을 벗어나 황급히 사라집니다. 구스첸은 나름대로 베르크 소령을 찾아 나섰지만,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미는 순간적으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죽으려고 연못 아래로 뛰어내립니다. 이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던 로이퍼가 그미를 발견하고 구출해줍니다. 드디어 폰 베르크 소령은 딸과 해후한 뒤에,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프리츠는 빚쟁이들의 추적을 피해 페투스와 함께 라이프치히로 떠납니다.

 

 

 

에른스트 야코비가 주인공역을 맡아서 연기하고 있다.

 

제 5막: 눈먼 마르테는 구스첸의 아기를 데리고 로이퍼가 머물고 있는 공립학교를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구스첸이 아기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이퍼는 아기가 자신의 소생이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립니다. 졸지에 그에게는 원치 않는 자식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로이퍼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스스로 거세해버립니다. 로이퍼가 거세했다는 소식은 공립학교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 친애하는 L, 로이퍼의 거세 행위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시토이앙의 기개와는 정반대되는 비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공의 거세는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과 금력의 위협에 맞서서 당당하게 싸우기는커녕, 자기비판을 통해서 외부의 압력의 회피하려는 졸렬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자해 행위이지요.

 

벤체스라우스는 설교하는 자리에서 로이퍼의 거세행위를 깊은 참회에서 비롯한 결단이라고 찬양합니다. 그곳에서 로이퍼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전혀 자신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자신의 곁에 있는 어여쁜 처녀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미는 농부의 딸로서, “리제”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리제 역시 로이퍼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그미는 주인공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 결혼을 약속합니다. 학교선생은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리제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리제로서는 오리와 닭을 키우려면 당장 남자의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로이퍼는 리제에게는 남편감이며 동시에 노동자로서 적격인 사내였습니다. 다른 한편 페투스는 복권에 당첨하여 일확천금을 얻게 됩니다. 프리츠와 페투스는 당당하게 고향인 인스터부르크에 당도합니다. 추밀원 고문관은 아들 프리츠를 용서합니다. 프리츠는 구스첸을 만나고, 그미에게서 아기를 건네받습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프리츠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가지를 결심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아이만큼은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지 않게 하리라고......

 

당시의 연극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습니다. “극작품에는 제각기 개성을 지닌 인간이 등장하고, 적확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어서 관객은 누구든 간에 선입견 없이 극작품을 즐길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극작품을 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겐 Götz von Berlichingen」(1773)에 버금가는 작품 내지 괴테에 의해서 집필된 명작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사실 「가정교사」에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곳곳에 배여 있습니다. 렌츠는 작품 집필 시에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타나는 짤막짤막한 장면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연극의 삼일치 법칙을 과감하게 포기하였습니다. 대신에 수년 동안 지속되는 두 개의 사건을 번갈아 병렬시키고 있습니다. 로이퍼의 이야기가 프리츠의 이야기와 지그재그 형식으로 이어지는 게 하나의 좋은 범례이지요. 이로써 등장인물들의 성격상의 진정성이 더욱더 돋보이게 됩니다. 또한 줄거리 역시 산만하게 전개되지 않고 주제상의 문제를 포괄하기에 충분합니다.

 

렌츠는 이 작품을 통하여 귀족들이 지식인들을 마치 하인처럼 부려먹는 가정교사의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할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 차이의 극복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렌츠의 다음과 같은 과감한 견해입니다. 즉 가정교사 계급은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하여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시민적 노예근성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나중에 브레히트는 바로 이 점을 강하게 부각시켜서, 렌츠의 극작품을 새롭게 개작하였습니다. 결국 권력과 금력에 대한 지식인들의 아첨과 신하근성은 주어진 사회의 하자로서 일회적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지식인들은 인민을 계몽하고 그들에게 주체 의식을 심어준 게 아니라, 오히려 지배계급의 로 살아오면서, 체제에 굴복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브레히트의 견해에 의하면 결국 히틀러와 같은 끔찍한 독재의 토대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독일의 비참상 Deutsche Misere”을 태동시켰다고 합니다. 만약 지식인 계급이 지배계급에 저항하고, 피지배계급의 의식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더라면, 독일 비참상이라는 역사의 비극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게 브레히트의 지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