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가벼운 내가 떠나리라, 혹은 메타세쿼이아

필자 (匹子) 2021. 9. 27. 11:02

 

 

승염이사 (僧厭離寺), 사염승거 (寺厭僧去중이 싫어 절을 떠날까, 아니면 절이 싫어 중을 떠날까? 이는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1980년대 말에 김수행, 정운영 두분 교수님은 학교를 떠났습니다. 학교의 재정을 문제 삼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학교 당국은 "사표를 제출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두 분 교수님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사표를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사표를 수리한 다음에, 두 분 교수님을 강제로 퇴직시켰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가장 치졸하고 가장 저열한 사기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수행 교수님은 다행히 S대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운영 교수님은 오랜 기간 실직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비분강개하면서 이에 항의하였습니다.

 

 

 

 

바로 이 무렵 나는 독일에서 학위를 끝낸 다음에 이 학교에 부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정운영 교수님을 복직시키라고 매일 격렬하게 데모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교수들이 회의하고 있는 동안에, 교회당 회의실의 정문을 강제로 잠그고 말았습니다. 끝장 토론을 벌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교수 감금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내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는데, 동안 (童顔)이라 학생처럼 젊어보였습니다. 학생들은 나를 나이 많은 학생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장벽을 뛰어넘는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채플실에 갇혀 있던 동료 한 분이 바둑판을 요구하기에, 바둑판을 가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때 나의 정체가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학생 한 사람이 기가 막힌 듯이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 참, 이런 비상시국에 한가롭게 바둑이라니..." 바둑판이 압수되었습니다. 학생 대표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신임 교수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일과 무관하니, 아무 상관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사안을 잘 모르니, 골치 아픈 일에서 빠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임 교수를 배려하는 고마운 조언이었습니다. 데모하던 학생들은 의외로 냉정하고 이성적이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들어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갈게요.만약 학생들이 억지로 안으로 떠밀었으면,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공권력은 학생 편이 아니었습니다. 조만간 백골단이 배치되었고, 학생들의 감금 행위는 무력으로 진압되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학내 사태를 잠시 잊기 위해서 나는  어느 사찰로 들어가 동안거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자리 잡은 뒤에 맞이하는 첫 번째 방학이었습니다. 이때 처음 조우한 나무가 메타세쿼이아습니다. 위의 나무는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가로수입니다. 곧게 뻗어나가는 모습이 참으로 멋집니다. 독일어로는 Umweltmammut- baum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수송이라고도 부르며, 길가나 정원에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경상북도 포항 근처에서 메타세쿼이아와 비슷한 화석식물인 메타세쿼이아 오키덴탈리스(Metasequoia occidentalis)가 발견되었습니다.

 

 

 

 

정운영 교수님 (1944 - 2005)은 마치 상록수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듣자하니, 실직 후에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80년대 말에 나의 제자, 고 (故) 이성욱과 함께 잠시 어느 커피숍에 들렀는데, 우연히 정교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성욱이 그분에게 나를 소개했습니다. "이분은 이번에 H대 인문대학에 채용된 박 아무개 교수입니다." 그분은 나를 치켜 보다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나 자신이 일순간 노바디 (nobody), 혹은 개돼지로 여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모멸감이 치솟았습니다. 왜 나를 무시하는가? 하고 한바탕 다투려고 하다가, 참았습니다. 지방대 출신인 나는 한국의 여러 학문적 서클에서 실력과 무관하게 이방인 취급을 당한 터라, 고통이 더 컸습니다. 정교수께서 어째서 나를 경멸했는지, 나중에야 어느 정도 유추하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H대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학교를 떠난 정운영 교수님은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지내면서 많은 글을 썼습니다.  

 

 

 

 

사실 메타세쿼이아는 태양이 비치는 지역에서 잘 자라며, 담양에서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높이 자라는 나무에 칼을 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관상, 혹은 전신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칼질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잎을 모조리 잘라버리기도 합니다. 가지가 잘린 나무는 다친 부분을 스스로 치료하려고 몹시 애를 씁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끊겨 나갑니다. 그대는 그대의 어머니의 머리칼을 다만 보기 싫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칼질할 수 있는가요?

 

 

 

 

 

 

메타세쿼이아의 곧은 나무 둥치는 강직함을 보여주지만, 가느다란 잎은 섬세함을 드러냅니다. 이는 나의 성격을 그대로 닮은 것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강인한 것 같지만, 속은 여리고 가냘픕니다. 겉으로는 냉담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휘황찬란한 폭포수를 아래로 떨구는 생명체 그것이 메타세쿼이아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정의 불길이 솟구치지만,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생명체. 아, 속으로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과 같은 격렬한 저항의 욕망을 지니지만, 나의 감정과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밖으로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그래, 메타세쿼이아는 바로 표리부동한 나였습니다. 

 

 

 

메타세쿼이아는  1억년전 백악기 공룡시대 화석에서도 발견되는 '살아있는 화석나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오래된 종의 나무입니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갈색의 잎을 낙엽으로 떨굽니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잎을 떨구고 나목 (裸木)으로 겨울을 나는 놈. 메타세쿼이아의 모습은 정말로 나를 많이 닮았습니다. 나 역시 추위에 몹시 약하지요.

 

 

 

 

메타세쿼이아의 열매. 놈은 열매를 남겨 미래를 기약합니다. 자신의 자식을 낳아서 멀리 퍼뜨리는 것입니다나의 정신적 자식은 나의 문헌입니다. 나의 은사 가운데에는 리영희 교수가 계십니다. 그분의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은사로 삼았습니다. 직접 가르치는 제자 외에도 책을 통해서 제자를 키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 저역서를 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울력의 강동호 사장과의 만남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헌으로 배운 제자가 나를 찾아온 적은 없습니다. 그만큼 나의 책이 형편없거나 어설프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흔히 이 나무가 100년 후에 결실을 맺는 것을 생각하면, 먼 훗날 나를 기억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메타세쿼이아의 꽃. 놈은 드물게 꽃을 피웁니다. 메타세쿼이아 속의 유일한 현생종이 있는데, 원산지는 중국 중부지방의 깊은 골짜기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 중국의 대도시가 아니라, 시골 방방곡곡을 여행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작은 가지와 잎은 줄기를 따라 끝에서부터 쌍으로 피어납니다. 식물학자들은 큰 앞사귀가 아니라, 잎이 세밀하게 나누어지는 게 진화된 잎사귀라고 말합니다. 

 

 

 

 

 

 

 

흔히 상록수를 변함이 없는 나무로 칭송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 푸른 잎을 남긴 채 우두커니 추위와 싸우는 상록수 - 너무 불쌍하고 가련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날더러 상록수의 지조를 지니라고 일갈한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고백하건대 지금까지 꿋꿋한 절개를 지닌 강인한 인간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겁이 많고, 참을성이 없으며, 심리적 압박감을 감내하지 못했습니다. 힘든 독일 유학 생활이 가난한 나를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포기하고, 오로지 학위 과정에 집중한 것도 가난의 고통을 가족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절실함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소극적으로 삶을 이어나간 자가 바로 나였습니다.

 

 

 

 

 

이번에 함께 퇴직하는 사회복지학과 남구현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분은 이번 학기 말에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 앞에서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전형적인 작은 인간인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분을 멀리서 바라봅니다. 그분이 독야청청하는 상록수라면, 나는 겨울이 다가올 때 붉은 낙엽을 땅위로 떨구는 메타세쿼이아입니다. 그분이 용감한 돈키호테라면, 나는 비겁한 햄릿으로 생활했습니다.

 

 

위의 삽화에서 한 남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빈부 차이는 더 이상 벌어지지 말아야 하므로, 내가 좀 잘라야 할 것 같아." 나는 오랫동안 다음의 규정 때문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총장 후보자는 반드시 목사이어야 한다." 이 규정은 하나의 규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십년 동안 한신 공동체를 중세의 수직적 계층 사회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교수님들이 분위기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가령 오동식 교수님의 영향력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제 80년 만에 규정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한 사람 위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서서히 한신 평등 공동체는 실현될 조짐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했나요? 단식 투쟁해도 안 되고, 단식 투쟁하지 않아도 안 될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게 최선이었을까요? 서울 가는 길은 많습니다. 나는 일선에 나서지 않고, 그냥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항문 (學文) 속으로 도피하였습니다. 학문적 업적은 쌓았지만, 나의 행동은 비겁함 그 자체였습니다. 교수 회의에 때로는 사보타주하고, 때로는 피상적이고 공허한 논의 자체가 싫어서 자주 빠졌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승염이사 (僧厭離寺), 사염승거 (寺厭僧去) 중이 싫어 절이 떠날까, 아니면 절이 싫어 중이 떠날까? 가벼운 내가 떠나야지. 나는 어떠한 단체에도 예속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