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책, 도서, 책이라.... K 교수를 생각하며

필자 (匹子) 2021. 9. 25. 11:25

언젠가 K 교수를 만났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 교수인 그는 일본 재벌의 아들이었는데,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계간지를 간행하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서  원고를 내미는 나에게 일갈했다. "당신이 무슨 유명세가 있나요? 우리 팀, 토론회에 참석하여, 무언가 기여하면, 출판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1.

껍질 문화. 한국의 도서는 표지부터가 화려하다. 서점에 가 보라. 그곳에서 양서를 찾기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드물기는 하지만 양서는 있다.

 

2.

양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아마 경험한 사람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양서를 찾는 게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고산준령에서 산삼 찾기에 해당한다면, 이는 실로 비극이다.

 

3.

저자의 이름. 필자들은 필자의 이름 뒤에 "저 (著)", 혹은 "지음"이라는 구차한 꼬리말을 첨부한다. 얼마나 남의 책을 교묘하게 표절하였으면, 이다지도 구차한 꼬리말을 남발하는 것일까?

 

4.

도대체 저자 약력이란 무엇인가? 학벌과 직위가 이름과 그 사람의 사상보다 먼저 인정받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왜 사진을 첨가하는가? 얼굴이 잘 생겼으면, 책이 더욱 가치 있게 변한단 말인가? 왜 이름 석 자만 번듯하게 달지 못하는가?

 

5.

또한 책마다 부제가 첨가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번역서일 경우, 책의 뒷부분에는 역자 소개까지 구차하게 덧붙여 있다. 출판사 측의 대답도 가관이다. 그렇게 달아야 책이 잘 팔린다나. [“권위 (authority, Autoritaet, autorite)”라는 단어 속에 이미 “저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게 과연 우연일까?]

 

6.

허나 생각해 보라. 책이란 오로지 내용의 훌륭함에 의해서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명세가 특정한 책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는 없다.

 

7.

훌륭한 문학 작품을 창조하겠다는 결심은 고결하다. 그러나 최고의 시성이 되겠다는 자의 결심은 얼마나 어리석고 가련한 것일까? 훌륭한 논문과 저서를 남기겠다는 자의 결심은 눈물 나도록 멋진 것이다. 달성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이에 비해 학계에서 제일인자가 되겠다는 자의 결심은 얼마나 헛된 망상인가? 그렇게 믿는 사람은 어느새 후학이나 동학의 시기심에 의해 정신적으로 짓밟히게 될 것이다.

 

8.

젊은이들이여, 대가 혹은 거장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무조건 그들을 존경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들이 창출한 작품이 훌륭하다고 스스로 판단된다면, 오로지 그 작품만을 높이 평가하라. 세계적인 학자에 대해 기죽을 필요는 없다. 그저 그들이 쓴 저서에 대해 그냥 옷깃만 여미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9.

탁월한 학자가 되겠다고, 이름을 떨치겠다고 공언하지 말라. 그저 훌륭한 작품을 남기겠다고 다짐하면 족하다. 이창호 기사가 세계 제일인자가 되겠다고 공언한 바 있던가? 그저 그는 훌륭한 기보 (棋譜)를 남기겠다고 항상 일갈하곤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