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셸링의 무덤가에서 (1)

필자 (匹子) 2021. 6. 28. 11:44

이 글은 에른스트 블로흐가 1934년 4월 27일에 「프랑크푸르트 신문 Frankfurter Zeitung」에 발표한 것이다. 20권의 블로흐의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기이할 정도이다. 집필 계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문헌에 실려 있다. Arno Münster (hrsg.)(1977): Tagträume vom aufrechten Gang, Sechs Interviews mit Ernst Bloch, S. 26 - 28. 그밖에 셸링에 관한 블로흐의 입장에 관해서는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라. (1) Ernst Bloch: Philosophische Aufsätze, Frankfurt a. M. S. 98f. (2) Ernst Bloch: Das Meterialismusproblem, Frankfurt a. M. S. 222 - 229. - 조영준 (2015): 블로흐의 유토피아론에 대한 자연철학적 고찰. 생태학적으로 정향된 실천적 자연철학의 정립을 위하여, in: 시대와 철학, 한국 철학사상 연구회, 2015 봄, 제 26권 1호, (387 –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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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스위스의 여러 지역을 방랑하였다. 우연히 작은 여관을 발견하여 다리 뻗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즐기기도 했다. 일찍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주위의 정경은 참으로 기이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가 눈앞에 전개되었던 것이다. 어느 오래된 묘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묘지는 창문 아래에 직접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 빛은 주철 사이에서 퍼졌는데, 부분적으로 노랗고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경작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장벽의 가장자리에 있던 어떤 형상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간밤에 흐릿한 빛을 받으며 명멸하던 물체였다. 기사 수도회의 관구장의 무덤이 그러하듯이, 높이 솟구친 대리석에는 많은 사람의 면모가 담겨 있었는데, 불명료한 빛을 받으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 타고 있는 기사의 동상은 낮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말 탄 사람은 영주 한 사람은 아니었다. 햇빛은 대리석에 새겨진 비명을 반사하고 있었다. “독일의 사상가, 추밀원 고문관이자 독일의 교수,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을 위하여” 양쪽에는 들보를 받치고 있는 여인상이 있었고, 비명 위에는 셸링의 돋을새김이 있었다. 셸링은 교사로서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의 눈은 학생들로 향해 있었는데, 자신이 들고 있는 책 속의 지혜를 접하라고 강조하는 것 같았다. 움푹 들어간 돋을새김 위에는 셸링의 흉상이 있었는데, 그의 면모는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폴레옹 시대의 장군의 두상과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셸링은 뷔르츠부르크 그리고 예나의 대학생이었다. 젊고 대담하며, 놀라울 정도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청년이었다. 머릿속에서 그는 자신의 전투장을 찾아서 사고를 개진해 나갔다. 수많은 열광적 사고가 그의 뇌리를 스쳐갔으며, 전투적 열정은 특히 세계의 영혼 그리고 기독교 사상으로 쑥쑥 뻗어나갔다. 셸링은 자연이라는 동맥 속으로 파고들어, 지하의 황금빛 찬란한 나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그리고 자연의 신비로운 심층부가 얼마나 충만한지를 탐색해 나갔던 것이다. 비명 아래에는 헌사가 새겨져 있다. “바이에른 황제 막시밀리안 2세 폐하는 자신이 사랑하던 교사에게 이 기념비를 세워주셨다.” 이 기념비는 1850년대 의고전주의의 시대 속에서 보존되어, 지금은 스위스의 라가츠에 설치되어 있다. 줄지어선 신 고딕 풍의 동상의 마지막 대열에는 고대에서 살았던 어느 기사가 나뭇가지 더미 그리고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망각된 기념비의 배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성장해 있었다. 나무는 마치 숲속에서 자신을 드러낸 사원의 정면처럼 보였다. 철학자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이 대담한 인간은 바로 여기서 영면하고 있구나. 셸링은 거의 80의 나이에 라가츠에서 사망했다. 그의 생몰연대는 1775년에서 1854년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폭정이 자리하던 “질풍과 노도”의 시기였고, 종말은 권위적 귀족들이 활개 치던 빅토리아 시대였다고나 할까. 당시의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셸링은 마치 화산과 같은 격렬한 열정을 동원하여 오랜 가간 동안 모든 교양을 하나씩 익혀나갔다. 주지하다시피 젊은 시절에 많은 것을 깨달았고, 튀빙겐 신학교에서 헤겔과 횔덜린을 사귀었으며, 이른 나이에 학문적 명성을 얻었고, 카롤리네를 사랑했다. 셸링은 기계주의의 사고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자연 철학을 강조했다. 그의 자연 철학은 어쩌면 피히테의 메마른 “비-자아 Nicht-Ich”를 놀라운 방식으로 활성화시키려고 하였다. 그것도 이른바 과정이라는 가장 휘황찬란한, 가장 의심스러운 그리고 가장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해서 말이다.

 

“자연에 대한 개념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것은 인식론적인 질문이다. 그런데 셸링은 이러한 질문 대신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개념에 대한 자연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이야 말로 셸링의 자연철학의 핵심적인 물음이며, 정신의 발전과는 정반대되는, 정신에 대한 자연의 발전 역사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자연은 하나의 조직체로서 수많은 피로 얼룩져 있는 일리아스, 다시 말해 트로이로 파악된다. 이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오디세우스의 정신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자연은 가시적인 정신이고, 정신은 비가시적인 자연이다.

 

동일한 신에서 유래한 피 (血)는 의식화되려는 자연 속에서 그리고 자연으로 화하려는 의식 속에서 솟아올라서, 최상의 지점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는 객체의 요소가, 정신 속에서는 주체의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북극 그리고 정신의 남극이라는 높은 곳에는 (인간의) 예술작품 그리고 세계의 예술 작품이 주어져 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된 두 개의 닻이다. 세계는 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야 말로 생명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을 전하는 셸링의 느낌이었다. 셸링의 이러한 사상은 1804년, 그러니까 자신의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어떠한 균열이라고는 발견되지 않는 조직체의 행복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