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셸링의 무덤가에서 (2)

필자 (匹子) 2021. 6. 29. 09:28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셸링은 매우 낯설고 기이한 사고를 개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놀랍게 등장한 것은 기독교의 어두움이었다. 이것은 기상천외하며,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심층부의 공간이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고찰할 때 한 인간이 깊은 숙고 속에서 유래하는 상으로서, 거기에는 노년의 진정한 그림자가 묘하게 투영되어 있다. (덴마크 작가 헨릭 폰토피단Henrik Pontoppidan은 『행복에 가득 찬 한스Hans im Glück』에서 생명력을 지닌 한 인간이 어떻게 성격적 붕괴를 체험하는지를 묘사한 바 있다. 주인공은 내심 그토록 증오하던 경건주의의 생활 방식을 떠올리면서, 자신 역시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종교”에 대한 셸링의 관심사는 객관적으로 고찰할 때 시대적으로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시민 사회의 역사적 진보 내지 시민의 합리성을 서서히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시민 의식과 합리성이 독일 땅에 생겨난 시점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왕정복고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해 있던 독일 땅에서는 역사 발전과 시민의 오성에 대한 믿음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에는 오성에 대한 희의주의 내지 반계몽주의가 다시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맞물려 낭만주의의 이중적 특성과 걸맞게 지식인들은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리고 합리성이 아니라, 비합리성 속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다.

 

상기한 분위기는 셸링의 관념 이론에 어떤 위기를 안겨주었다. 셸링의 관심사는 생명과 빛이라는 조화롭고도 깊이 넘치는 세상 대신에 세계의 어두움, 그 속에 처음부터 도사리고 있는 어떤 급진적인 죄악으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합리적 구성이라는 사고를 고려할 때 매우 낯선 무엇이었으며, 칸트의 “물 자체”의 논의를 거부하게 하는 것이었다. 셸링은 무언가가 당위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떠한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의식하는 저항적인 무엇은 현존재 자체로서 개인의 현실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저항하는 무엇은 현존재 자체와 다를 바 없는 개념이다. 그것은 개별적 현실 존재이며, 모든 형체에 근친하는 현실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은 강렬한 축하의 의미를 포괄하는 자연이며, 모든 “이념”과 가까이 있는, 자연으로 화한 무엇이다. 이제 세계란 셸링에 의하면 세상 속에 도사린 죄악을 다시 떨치고, 현실적 존재로부터의 일탈을 통해서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셸링은 신에게로 돌아가는 자연 회귀의 역사를 전개해나가고, 오디세우스의 진정한 고향 찾는 이야기를 진척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셸링은 책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연구』(1807)에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피력했는데, 이는 당시 독일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자고로 자유란 신적인 특성과 위배되는 것이라고 한다. 자유는 이른바 자기 결정권, 개별 의지 그리고 실제로 주어진 사실의 특별한 의지 등과 같은, 사탄의 기본적 동기에 의해 가득 차 있는 무엇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욕망과 같다. 여기서 셸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명하다. 즉 셸링은 야콥 뵈메Jakob Böhme의 빛과 어둠의 존재론적 진행 과정을 참고하여, 실낙원의 상태를 다시금 신의 영역 속으로 되돌려주려고 의도하였다. 말하자면 신이란 셸링에 의하면 이념에 대한 근원적 의지 내지 세상의 어두움 자체로서, 영원히 자기 자신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셸링 개인을 둘러싼 여건은 더욱 침울해지고 고독하게 돌변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사건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나 다를 바 없었다. 1809년 그의 부인 카롤리네가 급사한 것이었다. 셸링은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머리가 멍해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이 마구 흔들리는 것 같아요. 애절한 마음을 달랠 방도가 없을 정도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내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오로지 죽는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나 자신의 것이라고 명명했던 그미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 가장 고결한 심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 속의 영원한 달콤함 속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그립고 위대한 분이 너무 일찍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나에 대한 그미의 사랑에 감사함을 느낄 뿐입니다.”

 

철학자는 아내를 잃은 뒤의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침묵은 거의 30년 이상 지속되었다. 자유에 관한 문헌과 첨가 논문 그리고 1840년 베를린 강의 사이에는 어언 30년 이상의 공백기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 사이에 셸링은 그리스 사모트라케 섬의 신들에 관한 어떤 짤막한 고고학적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물론 셸링의 고고학적 논문이 나중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 논문을 통해서 그리스 연구가들이 추구한 고대 그리스의 지하 명부의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백일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셸링의 논문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고고학 연구에서 고대의 모권 사회 그리고 디오니소스 등의 시각이 활발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를테면 바흐오펜에게서는 고대의 유물의 형태로, 니체에게서는 예언자의 면모로, 그리고 클라게스에게서는 과거지향의 반동성으로 출현하지 않았던가? 셸링은 비교적 오래 살았다. 그의 수명은 철학의 영역에서 자신보다 더 커다란 승리를 구가하고, 자신을 제 2인자로 밀어냈던 헤겔보다 더 길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만끽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철학이 헤겔 사상과 필적하게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헤겔이 죽은 뒤 10년이 되는 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셸링을 베를린 대학의 석좌 교수로 초빙하게 된다.

 

이때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는 오랜 침묵 속에서도 머릿속의 작업을 영속적으로 이어나갔다는 사실 말이다. 말하자면 꺼져가는 재능에 신학적 불꽃이 다시 점화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셸링은 헤겔이 자신에게서 철학적 구상을 답습하여, 이를 철학적 형태로 정립시켰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러했다면, 오늘날 사람들조차도 셸링의 새로운 철학적 선언에 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언젠가 헤겔은 셸링의 초기 철학에 나타난 사고를 무척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 이후에 드러난 셸링의 새로운 철학의 자양 속에는 어떤 경험, 즉 종교적 경험이 첨부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개념적이고 부정적 특성 속에만 편입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신이 자신의 면모를 드러낸다면, 자연적, 역사적 현실이라는 어떤 변증법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형체 속에서 그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한다. 부정의 철학은 -셸링의 발언에 의하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사항은 셸링에 의하면 결코 헤겔 방식의 논리 내지 범-논리주의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추론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셸링에 의하면 인류의 종교적 근원에 관한 이해 내지 신에 관한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러한 의식은 『신화와 계시의 철학』에서 분명히 제시되고 있다. 신의 존재 그리고 초월적 세계의 내용은 셸링에 의하면 스스로의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의 역사는 “신통계보학Theogonie”이며 동시에 “우주의 개벽에 관한 이론Kosmogonie”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전주의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명시 「산책Der Spaziergang」에서 이러한 전체의 역사가 포괄적 형태로써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간다고 묘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