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어째서 철학자들은 물질에 둔감했는가? (1)

필자 (匹子) 2020. 8. 13. 11:34

 

머리빗을 때 빗 위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무작정 잘라버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예외성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이 술꾼들이고, 스코트랜드 인들이 절약 정신이 강하며, 독일인들은 커피마시면서 책을 읽으며 지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반적 발언은 그 자체 보편적 편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었던 방식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사람들은 소재가 한 조각 나무토막이고, 모든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출현할 수 없다고 가정합니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애벌레 한 마리, 혹은 어떤 사고가 어떻게 죽어 있는 소재 덩어리에서 유래할 수 있는가? 어떻게 돌덩이가 동물처럼 움직일 수 있으며, 인간의 뇌가 죽은 나무토막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어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만약 그러한다면 인간의 뇌는 도구 내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유희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정신이 뇌에 일차적으로 충동을 가하여 자신의 것을 작동시키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상기한 모든 사항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반 사물들은 말하자면 물질의 지속적 상투성을 전제로 합니다. 가령 애벌레 한 마리 그리고 이른바 추상적 존재가 처음부터 단순히 소재의 개념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어떻게 생명체가 가능하며, 추상적 사고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보세요.

 

물질이 한 조각 나무토막인데, 여기서 모든 생명체 그리고 정신이 비롯되었다고 믿는 것은 물질의 보편성을 처음부터 하부 구조로 정해 놓은, 하나의 우상화된 사고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물은 기계주의의 방식으로 출현하고,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 차단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영특한 사상가들은 물질이 예컨대 동일한 금속 틀로부터 동일하게 제련되는 금속의 형체와는 달리 보다 다원주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천박한 유물론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물질의 경박한 보편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유명론이라고 비난을 가했습니다. 그의 비난은 일견 예기치 않은 것처럼 울려 퍼졌지만, 사실은 깊은 숙고 꿑에 비롯한 것입니다. 가령 물질이 마치 과일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보편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이는 사과, 배, 포도 등의 존재를 좌시하는 처사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와 같이 물질은 지금까지 복합적인 현존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해명되었으며, 발전사적으로 고찰할 때 여러 가지 개념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논할 때 기계주의의 토대는 여전히 온존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엥겔스는 『자연의 변증법』에서 물질의 유형과 관련되는 아주 분화된 특성들을 서로 구분하면서 새로운 시발점으로서의 물질의 어떤 구분된 개념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엥겔스의 이러한 물질 개념은 지금까지 이해된 물질의 통상적인 개념과는 다른, 이것들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입니다.

 

가령 엥겔스는 여러 가지의 식물들, 여러 가지의 동물들 뿐 아니라, 노동을 통한 인간화의 작업을 거론합니다. 나아가 경제적 하부구조 뿐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상부 구조도 물질을 논할 때 생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때 상부 구조는 이른바 경제적 하부구조를 다소 흐릿하게 성찰하게 하는 무엇이 아니라, 때로는 주어진 현실에서 그 자체 소재 내지 에너지로써 하부 구조를 작동시키는 무엇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모든 하부 구조는 「경제 철학 수고」를 집필할 당시의 마르크스의 견해에 의하면 자연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연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인간에 의해 의존하지 않는 동자적인 고유한 영역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자연은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 이전에 이미 주어진 영역으로서, 말하자면 우리 아래에 위치하는 무엇일 뿐 아니라, 어떤 우주적인 폭넓음으로 인간 존재를 감싸고 있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은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이후의 마지막 고유한 영역으로 명명될 수 있는데, 인간은 낙관적 미래주의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 자연 속에서 문화적 상부 구조를 가득 채워나갈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자연의 인간화”를 언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화란 “자연의 부활Resurrektion der Natur”을 전제로 하는데, 물질적으로 완전히 “자연으로 변모한 인간 존재”라는 의미를 내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입장은 초월하는 실체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연화”는 물질의 어떤 현세의 관점에서 통용되는 개념을 벗어나서 저세상의 초월로 이어나가지 않습니다. 물질 내지 물질 이론은 -비록 그 속에 마치 자외선과 같은 놀라운 폭발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분 내지 현존 형태 속에서도 하나의 일원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내재적 특성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엥겔스는 “물질 이론은 세계 자체에 대한 해명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물질에 관한 어려 가지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 얼마든지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사항입니다. 기계주의의 물질 이론, 철학적 물활론 그리고 변증법적 물질 이론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들은 공히 세계 자체를 해명하기 위해 마련된 물질 이론들입니다. 여기서 바로 이러한 일원성을 통해서 본연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변증법일 것입니다.

 

사실 플라톤 그리고 헤겔 조차도 변증법을 비유적으로 말해 “낯선 지역에 머물고 있는 어떤 처녀”로 취급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변증법을 기껏해야 인간적으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식 내지 어떤 로고스에 합당한 존재의 방식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물질 그리고 변증법은 지금까지 복합적 시구에서 유래된 어설픈 조합이었는데, 이제는 변증법적 물질 이론을 통해서 우주에 합당한 우주론적인 사고로 판명된 것입니다.

 

단순히 머리빗 위로 솟아오른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이를 일원성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결코 변증법 속에 도사리고 있는 특별한 경우라든가 다양한 변수들을 발견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현세의 탈신화적인 시각으로 고찰하면서 눈앞의 당면한, 서로 대립되는 사안들을 서로 비교하는 방법만으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각 내지 방법론에서는 거대한 변화를 담지하고 있는 우주론적 전망을 포괄적으로 간파하려는 의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것만 바라보려는 시각 내지 방법론은 우리의 눈을 감기게 하고 작은 이론들만 맹신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편협하고도 근시안적인 시각은 대부분의 경우 아주 아름답고 아주 거창하게 만들어낸 피상적인 틀만을 드러내는 무엇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계주의의 시각으로서 그저 지엽적인 면만을 고찰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아주 높이 넘실거리는 정신의 이상적인 이념을 예리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만 잔뜩 관심을 기울이게 되니까요. 요약하건대 기계주의의 시각은 기껏해야 불필요한 마누 그루터기와 같은 무엇을 옹호할 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차제에 찾아서 인지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어떤 휘황찬란한 색채를 지닌 무엇, 일견 방해하는 듯하지만, 무언가를 촉진시키는 정교한 무엇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향해서 세상을 개방시키는 영역에 해당하는 무엇일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예리하게 간파해낼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놀랍고도 기이한 사실을 접하게 되는데, 이는 한 번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사항이기 때문에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데모크리토스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의 위대한 철학자들 모두가 한결같이 관념론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무엇보다도 정신에 관해 사고해 왔습니다. 물론 사고하는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스스로 선택한 학문 중심적인 상아탑의 영향 때문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배 세력은 지금까지 사상가들에게 은근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을 표명해달라고 은근히 사회적으로 요청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