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셸링의 무덤가에서 (3)

필자 (匹子) 2021. 6. 30. 09:47

셸링은 1803년에 이미 「대학 수업의 방법론에 관한 강연Vorlesungen über die Methode des akademischen Studiums」에서 자신의 제반 철학을 교육학적 차원에서 자세히 논평한 바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철학은 제반 학문을 다루는 대학 내에서 문과 대학의 틀 속에서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든 셸링의 강의에는 셸링 초기 시대의 이러한 내적으로 광활하고 심원한 노선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대신에 셸링은 세계의 토대에 관한 역사 자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이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나이든 셸링의 사고 속에 과거에 개진했던 의식 철학에 관한 입장 그리고 이성의 관념 이론에서 유래한 자신의 구상 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셸링은 당시까지 이어지던, 비합리적인 종교적 소재를 스스로 해체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변화된 시대를 감안하려는 의도는 그의 “긍정적이고 경험적인” 열정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는 주위의 여건을 감안하여, 은근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표현되고 있지만, 셸링이 강조하는 긍정성과 경험성이 은폐되어 있지는 않았다. "실증성" - 그것은 형이상학의 개념에 피곤함을 느끼고, 사업에 충실하며,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사업가들이 주로 사용하던 용어였다. 또한 정통성을 중시하는 반동주의를 표명하는 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위해서 사용하던 용어였다.

 

셸링은 당시의 헤겔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긍정성과 경험을 강조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반동적 신화학으로 곡해하였다. 말하자면 셸링이 제기하는 사상은 실제의 현상을 가리게 하는 천국의 구름 그리고 현실적 종교의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의 강연을 듣던 학생들은 “긍정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어떤 오해의 소지를 없애는 태도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셸링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바쿠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엥겔스, 야콥 부르크하르트, 레오폴트 랑케, 알렉산더 훔볼트 등이었다. 이 가운데 키르케고르는 나중에 강의에 불참하게 된다. - 역주) 사람들은 셸링의 강연이 낯설고, 뜬금없다고 논평하였는데, 이는 당연한 요구사항이었는지 모른다. 셸링은 도중에 강연을 취소했다.

 

셸링은 “사실 내용”의 카테고리를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는 당시 키르케고르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셸링의 『신화와 계시의 철학』은 마니케이즘이라는 예언적 종교 사상이 출현한 5세기에 제대로 수용이 가능했을 뿐, 19세기의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고답적인 사상이었다. 몇몇 철학자들은 셸링을 외면하면서, 헤겔 사상의 기괴한 암벽의 멜로디를 지상으로 끌어내곤 하였다.

 

혹자는 말년의 셸링의 신화와 계시의 사상이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시스템 속에서 만개하리라고 기대하였지만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시스템에 의하면 존재는 이념적 존재와 현실 존재로 나누어진다. 전자인 이념적 존재는 초시대적 보편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여기에는 수학적 형상, 본질, 윤리적 가치 그리고 미적 가치가 해당된다. 후자인 현실 존재는 시간에 의존되는 개별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다시 공간적 특성과 비공간적 특성으로 나누어진다. 비-조직체 그리고 생명체는 공간적 특성을 지닌 현실존재에 해당하고, 영혼과 정신은 비공간적 특성을 지닌 현실존재에 해당된다. 그런데 블로흐는 하르트만의 이러한 구분 자체를 작위적이고 도식적이라고 비판한다. Hartmann, Nicolai, (1935/ 1950) Ontologie. 3. Bd. Der Aufbau der realen Welt: Grundriß der allgemeinen Kategorienlehre, Berlin. - 역주),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도 여러 가지 하자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셸링의 전체적 사고를 포괄하고 있는 환상적인 어조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가령 우리는 자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우아함을 읽어야 하고, 전적으로 순응하지 않는 화려한 로코코를 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근원 속으로 변화무쌍하게 파고들면서 여기서 출현하는 다양한 사고를 추체험해야 하는 게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셸링이 구성적으로 고찰한 자연이라는 근원 속에는 생기 넘치는 무엇 그리고 무언가를 예견하게 하는, 혼란스러운 성장의 근친성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가는 좋은 자리에서 영면하고 있다. 주위에는 자연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개울 아래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높은 곳은 마치 거대한 빙하를 연상하게 하는 산이 보인다.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타미나 계곡이 있다. 그곳으로 잠입하면, 사원이 나타나는데, 사원의 정문이 보행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모든 생명과 결부된 사고가 오로지 정태적으로 느껴지는 게 참으로 기이하다. 생명을 지닌 조직체는 메커니즘의 더 높은 단계를 밝혀주고, 그 자체 놀라운 생명력을 드러내는데도 말이다.

 

셸링은 마치 자신이 증인인 것처럼 하나의 상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현존재에다 끓어오르는 열기의 생명력을 부여한 철학자가 셸링이 아니었던가? 셸링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사실은 강력한 눈길로 완성된 미학, 혹은 잘 알려진 저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고대의 무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편안한 향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만약 정신이 가시적인 자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면, 살아있는 셸링은 다시 우리 앞에 본연의 철학자로 등장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