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어째서 철학자들은 물질에 둔감했는가? (2)

필자 (匹子) 2020. 8. 13. 11:35

 

그렇지만 사상가들은 이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예리하게 탐색해내지도 못했고, 이러한 마키아벨리 사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교활한 술수를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물질 이론의 유사성을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위험 수위 아래에서 재단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재단은 엄청난 메커니즘이라는 위험성을 동반하는 것이었는데, 수준을 고찰할 때 물질은 마치 작은 애벌레와 같은 무엇으로 축소화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지적인 깊이는 조금도 자리하지 않으며,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가시적 특성만이 부각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야곱 몰레스호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마치 다리에는 걸음걸이 근육이 작동되듯이, 뇌에는 사고의 근육이 작동된다. 마찬가지로 오줌이 콩팥에서 분리되듯이, 인간의 사고는 오로지 뇌에서 분리되어 추출되는 무엇,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단선적인 사고는 카를 카우츠키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운동은 카우츠키에게는 그저 자그마한 일부의 사건일 뿐, 어떤 의미심장한 역사적 전망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해명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종교 개혁은 기껏해야 당시 유럽의 목화 판매시장의 구조를 대폭 변화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카우츠키의 이러한 논평은 더 이상 계몽주의적 사고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레싱의 표현에 의하면 “거짓된 계몽”에 불과한 것으로서, 엥겔스는 그것을 “거짓된 계몽으로써 씻어 없애는 행위”라고 일컬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증적 자연 과학자들은 엥겔스에 의하면 최소한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에 관한 이론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을 논할 때 계몽주의 속에 내재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갈망의 정신이 자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물음은 부차적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물질 이론 속에서 발견된 어떤 판에 박힌 독창성을 고수하려는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른바 혼동되지 않는 믿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단순히 하나의 나무토막으로 간주하게 되면, 사람들은 어떠한 다른 유형의 물질을 얼마든지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관념론을 표방하는 유명한 사상가들은 자신의 모임을 통해서 물질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물질의 쉽사리 왜곡될 수 있는 묘한 특성조차도 예리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물질의 본질이 확고하게 밝혀지지 못한 근본적 이유는 사람들이 물질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궁금증을 느끼면서, 이러한 영역을 심도 있게 탐색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진부한 무엇으로 매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관념론이 지금까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막강하고도 폭넓게 등장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이해된 물질을 단숨에, 다시 말해서 순식간에 피상적인 사물과 관련되는 무엇으로 단정하고, 물질의 내용을 거의 경솔할 정도로 폐쇄적이며 아무런 관련성을 지니지 않는, 편협한 영역 속에서 마구잡이로 속단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른 당혹스러움, 아니 결코 당혹스럽지 않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셸링 그리고 헤겔 등과 같은 위대한 사상 속에서는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간에 어떤 비밀리에 은폐된 물질 이론의 면모가 발견되고 있다는 게 바로 그 사실입니다. 특히 헤겔 철학의 경우에는 은폐된 물질 이론의 특성이 놀랍게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르크스가 시도한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물질적 전복은 그렇게 각양각색으로 추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령 관념이 물질로 전복되는 경우는 변증법에서 뿐 아니라, 미학의 척도에서, 심지어는 종교 철학에서 여지없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컨대 포이어바흐는 자신의 종교 철학에서 물질의 전복을 그저 피상적으로 다루었지만, 젊은 마르크스는 물질적 역사 철학의 어떤 발화점을 놀라울 정도로 명징하게 탐색하여,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소외의 행위가 어떻게 발생하고 다시 환원되는가 하는 문제를 핵심적으로 구명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대한 관념 철학자들이 남긴 물질 이론의 유산 그리고 그 특수한 역할을 밝혀내는 작업일 것입니다. 물질 이론가들은 물질을 하나의 완전히 파악된 사실로 이해한 것과는 달리, 관념 철학자들에게는 사고를 요청하는 난처함 내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물질을 염두에 둘 때 난처한 듯이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 이를 교묘히 은폐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물질 자체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고 이에 들을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 이론가들에게 정신은 결코 하나의 완전히 파악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사고를 요청해내는 난처함 내지 당혹스러움으로 작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란 물질 이론가들에게는 어떤 사고를 부추기는 어떤 은폐된 당혹스러운 무엇, 아니면 그야말로 무의미한 무엇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물질 이론가들은 정신을 어떤 성적인 욕망이라든가, 이윤 추구를 위한 어떤 욕구 내지는 철저히 관념과는 무관한 어떤 연료 등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을 어떤 개인적 사적인 무엇으로 간주하고, 마르크스가 정신을 사회를 추동하는 객관적인 무엇으로 이해한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관념론자들이 이해한 정신의 개념보다 유물론자들이 수용한 정신의 개념에서 무언가를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물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을 발전사적인 차원에서 물리학의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철학의 역사에서 위대한 관념적 철학자는 많이 나타났으며, 위대한 물질 이론가는 드물게 출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철학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에 물활론을 표방한 물질 이론가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설파한 탈레스로부터 사고의 소재를 “누스”라고 성정해낸 아낙사고라스에 이르기까지 물질 이론은 드물게 존재했습니다.

 

이른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했던 철학자들은 물질 이론의 영역에서 상당히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전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소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관념주의의 사상가가 아니던가요? 나중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다시 설명 드리겠지만, 그는 객관적 현실적 가능성을 “잠재적 역동적 존재δυνάμει ὄν”라는 개념으로 해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형태를 잉태하는 개방적인 물질을 바로 그러한 개념으로 철학사에서 가장 처음으로 설파한 철학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주 중요한 우주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물질 이론의 역사에 관해서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제반 철학자들의 물질 개념을 고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잘 알려진 개념이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은폐된 물질 개념을 깊이 천착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물질이 단순히 하나의 나무 그루터기 그 자체도 아니고, 폐쇄적으로 마치 번개의 빛이 날씨가 변화될 때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자기장의 영역으로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물질 속에 도사린 신비로운 “모성mater”의 의미를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스피노자가 모든 기계주의의 제한에 반대하면서 “확장 Extensio”의 의미를 “완료된 사고 Cogitatio”의 곁에 설정한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어는 스피노자가 “자연 혹은 신natura sive Deus” 그리고 “실체 혹은 신 substantia sive deus”이라는 무한적 부가어를 사용할 때 생략한 것들이 아닌가요? 어쨌든 우리는 물질을 고찰할 때 기계주의와는 다른 시각을 견지해야 하며, 새로운 유형의 물질을 예리하게 투시하고 준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유형의 물질은 도처에 수많은 거품 섞인 내용을 모조리 걷어내야 스스로 개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외부로 확장되는 형체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형체의 암호를 우리에게 전해줄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유형의 물질은 세계 속에 도사린 바람직한 무엇, 전체성 속의 현실적 문제점을 알려주고 “마지막 사물”로 출현하기 위해서 완강하게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암시를 우리에게 은근히 전해주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이야 말로 도처에서 출현하려고 하는 물질의 진정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질은 녹슨 금속 찌꺼기도 아니고, 나방과 같은 곤충의 유형으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고 행위 뒤에 남겨지는 연기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근원적 안개로 매도될 수도 없습니다. 물질은 그 자체 어떤 유토피아를 담지하고 있는 존재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의미를 생략한다면, 물질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마치 연기로 사라지는 사상적 자취, 아니면 원초적 안개가 남기는 순간적 여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