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Bloch 번역

블로흐: 아비켄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 (10)

필자 (匹子) 2020. 3. 17. 09:58

그런데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본질적으로 잠재적 역동성의 존재”, 즉 수동적인 가능성 속에 현존하는 존재”, 바꾸어 말하면 잠재적 능력으로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마치 형체로 출현한 세계의 물질처럼 어떤 주어진 여건에 따라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자신을 실현시키는 작용 형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오로지 능력입니다. 그것은 행위 속의 능동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소재 없이도 얼마든지 영향을 끼치는 작용하는 존재는 신입니다. 신은 모든 사물을 움직이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소재는 가능성의 상태에서 실현의 상태로 이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소재 스스로가 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엔텔레케이아에 어떤 운동의 특성을 부여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움직이는 엔텔레케이아를 하나의 불완전한 엔텔레케이아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개념은 객관적 가능성이라고 하는 중요한 기본적 특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지니고 있는 어떤 발효하는, 아직 끝나지 않은 특성, 다시 말해 스스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아직 끝나지 않은 특성을 여전히 지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특성에 대한 암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에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르메Όρμή의 이론에서 형태로 나아가려는 물질의 욕구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는 그밖에 플라톤의 에로스가 객체 존재 내지 물질 존재로 밝혀내려는 성향으로 해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 속에 도사린 과정의 동인 (動因)에 관한 놀라운 지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질의 수동적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여전히 파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물질 속에 내재해 있는 엔텔레케이아의 놀라운 행위의 특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속에 미약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재 속에 그저 엔텔레케이아가 존재하며, 이것이 소재를 자극하여 하나의 형태를 낳게 한다고 수동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비켄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을 추종하면서, 여전히 물질 그리고 작용 형태를 서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을 더욱더 중시하며, 물질의 역할에 더욱더 커다란 비중을 부여합니다. 작용 형태 가운데 최상의 것은 신의 작용형태를 가리키는데, 아비켄나는 신의 개념을 단순한 점으로서의 물질 하나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신은 아비켄나에게는 마치 숨결과 같은 단순한 점으로 물질적 형체를 벗어나는 무엇으로 파악됩니다. 아비켄나는 자신의 철학적 백과사전의 일부에 해당하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다음과 같이 논합니다. 즉 어떤 실재하는 무엇을 낳게 하는 가능한 무엇은 탄생의 가능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는 어떤 주체를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주체가 바로 물질입니다. 물질은 탄생의 전제 조건으로서 스스로 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영원성에서 비롯한 어떤 근원적인 무엇이며, 출현하지 않은 무엇입니다. 아비켄나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물질의 창조되지 않은 특성은 논리적 측면에서 아비켄나의 가능성의 개념에 의해서 놀라울 만큼 첨예화되어 있습니다. 물질은 아비켄나에 의하면 형태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원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결코 고유한 존재가 결핍되어 있는 어떤 단순히 현존하는 무엇이 아니라, 형태에 대하여 이미 제각기 정해진 소질을 매개하는 토대, 소질에 대한 기본적 수단이 되는 토대를 가리킵니다.

 

아비켄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즉 가능성의 주체에 필연적으로 첨가되는 것은 어떤 실현의 원인 주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극하는 것은 어떤 가능한 무엇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물질이 모든 사물의 가능성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물질 속에 내재하지 않는 어떤 원인자를 생각해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을 가능성으로부터 실제 현실로 끌어내게 하기 위해서는 물질과는 구분되는 어떤 형태의 수여자dator formarum가 기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비켄나는 어떤 신의 영향력을 현저하게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신은 아비켄나에 의하면 존재에 생명을 부여하고 존재가 세상에 머물 수 있게 한 것 외에는 더 이상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이라는 순수한 행위자actus purus속에는 어떤 무엇 내지 정수 (精髄)와 같은 내용물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무엇으로서의 존재 내지 정수Essenzen”는 아비켄나에 의하면 처음부터 어떤 존재로서 저장되어 있는 객관적 가능성 속에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신은 아비켄나에 의하면 일깨우는 자입니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소재 없는 순수한 행위자로서 최소한 형태를 승인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아비켄나는 신을 형태를 부여하는 자 대신에 그저 신호를 보내는 자라라고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물이 성숙하도록 발전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신의 내부에는 정수라든가 어떤 존재 그리고 형태의 본질 등의 총합체가 생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추상적인 첫 번째 물질materia prima은 그 자체 삼라만상, 다시 말해서 형태의 총체를 멀리서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태가 뒤섞이는 사건의 과정에 의해서 구체적인 세계의 물질 속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개별적인 존재를 도출해내는 원칙들은 물질을 저장하도록 작용하는 무엇이다. (...) 이러한 저장이 어떤 특정한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더 먼저 출현하도록 결정을 내린다. (구체적인 세계의 물질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저장은 어떤 특정한 개별적 형태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관계에 다름 아니다.”

 

본질 자체는 이미 물질의 소질 속에 처음부터 특수하게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특수하기 때문에 아비켄나는 수많은 유형의 물질을 하나씩 세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변화의 유형을 하나씩 헤아리는 경우와 동일합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을 들 수 있습니다. 장소의 변화, 특성의 변화 그리고 조직체의 변화가 바로 그 유형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속에 자리하는 여러 가지 형태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 종속되어 있는 특정한 물질적 가능성과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분리된 형태의 개념은 아비켄나의 경우 일시적으로 물질에 부착된 현실적 실체의 어떤 부분을 일탈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아베로에스는 나중에 이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아비켄나는 자신의 기본 요소에 관한 이론에서 물질에서 형태가 일탈될 때 기능하는 것을 물질의 내재하는 불내지는 물질의 불과 같은 진리라고 명명했습니다.

 

상기한 방식으로 아비켄나는 소재와 형태 사이의 관계를 달리 체계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아베로에스가 언급한 산출하는 자연이라는 물질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의 완전한 형체 내재적 특성과 매우 근친한 이론입니다. 아베로에스의 견해에 의하면 물질은 그 자체 생명의 싹으로서 모든 형태를 내부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물질에는 근본적으로 운동의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엔텔레케이아로 명명하여 수동적으로 해명한 것과는 달리, 아베로에스는 물질의 운동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물질에는 천체의 빙빙 도는 움직임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물질 속에 그야말로 영원히 위치하고 있는 형태들을 성장시키면서 밖으로 출현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합니다.

 

아베로에스는 알가잘리에 대한 반박Destructio destructionis(disp.1)에서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결정적 발언을 남기게 됩니다. “어떤 사물의 출현은 자신의 잠재성을 그 속에서 증명되는 현실로 전환시키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Generatio nihil aliud est nisi converti res ab eo, quod est in potentia, ad actum.” 말하자면 형태는 오로지 소재 자체에서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발전은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물질로부터 형태의 추출eductio formarum ex materia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창조한 것은 아베로에스에 의하면 신이 아니라, “산출하는 자연의 창조적인 에너지이며, “산출되는 자연 natura naturata이 출현하게 된다고 합니다.

 

세계의 출현으로 향하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질의 발전 개념을 거쳐서 최상으로 산출하는 자연natura supernaturas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최상으로 산출되는 자연natura supernaturata의 문제와 조우하게 되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은 천국의 기능을 완전히 전환시키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심령학의 형태로, 신앙을 통해서 미래의 세상을 천국으로 상상하지 않았는가요? 만약 우리가 하나의 증류기 내지 잠재적 보물 창고로서의 물질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 이를 파악하려 한다면, ”발전이 물질로부터 형태의 추출이다.라는 공식은 더 이상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슬람 독단론자들은 아비켄나와 아베로에스를 저주하고, 그들의 작품이 마치 밀랍 인형이라도 되는 듯이 불살라버렸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종교재판관이 조르다노 브루노를 체포하여 불태워 죽인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