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집니다.)
나: 노장 사상 역시 죽음을 재탄생을 위한 사멸이라고 이해하지만, 그것을 커다란 고통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장자(荘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인간은 조물주라는 대장장이가 만들어낸 칼 한 자루에 불과하거늘, 대장장이에게 “막야(鏌鎁)와 같은 명검으로 만들어 달라.”, “다음 세상에도 인간으로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荘子』 「内篇」, 6 太宗師, 제 3장 참고) 이승은 작은 세계이며, 저승은 큰 세계이므로, 어디서 살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게 장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너: 마지막으로 전 시인의 명시,「영락 공원에서」를 다루어볼까요?
산비탈 양지 녁에 저승이 펼쳐져 있다
포실한 삶이었든
땟국물 흐르는 삶이었든
한 줄 생몰연대로 비문에 압축돼있다
쾌락의 씨알로 태어나
희로애락이란 연극판에서
각자 부여받은 배역으로
애면글면 숙제를 마친 배우들
은퇴하고 누워있다
통과의례에 수고했다고
정말 애썼다고
어미가 태어난 송아지 핥듯이
가을 햇살이 봉분을 한없이
어루만지고 있다
8.
너: 영락 공원이 마치 카메라의 앵글에 비친 상처럼 명료하게 투영되는군요.
나: 네. 해설이 불필요할 정도로 평이하게 읽혀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통과의례”라는 시어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장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지요?
너: 그는 현세의 고충을 저버리고 보다 큰 세계로 훌훌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행동했지요. 범인은 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자에게 죽음이란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배웅하는 자는 아쉬움과 불안감을 간직하곤 합니다. (Ernst Bloch: Spuren, Frankfurt a. M. 1985, S. 131).
너: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닐까요?
나: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종교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찬란히 서술한다는 사실입니다.
너: 종교는 궁극적으로 영생에 대한 갈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려는 신앙인의 욕구와 관련되지요.
나: 네, 작품을 논하기로 합시다. 인간은 누구든 간에 “쾌락의 씨알”로 태어나, “희로애락”의 무대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죽습니다. 망자들은 시인의 눈에는 “애면글면 숙제를 마친 배우들”처럼 비칩니다. 자신의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정성을 다해 살아간 뒤에 “은퇴”한 자들의 휴식처 - 이곳이 영락 공원이라는 것입니다.
너: 놀라운 것은 마지막 연입니다. 죽음은 시인에 의하면 어떤 새로운 탄생으로 향하는 일시적인 “통과의례”와 같습니다.
나: “어미가 태어난 송아지 핥듯이/ 가을 햇살이 봉분을 한없이/ 어루만지고 있다.” 저승에서 가을 햇살은 어미의 혀로 봉분을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없이? 가을 햇살을 어미의 혀로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기막힌 발상 아닙니까?
너: 비록 시인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망자가 휴식하는 곳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문지방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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