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전홍준의 시 「영락 공원에서」 (2)

필자 (匹子) 2021. 7. 1. 07:03

(앞에서 이어집니다.)

 

4.

: 그럽시다. 일단 작품에서 강조되는 죽음이라는 테마를 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해서 논하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몽테뉴는 철학 행위가 죽음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죽음에 관한 책만 해도 엄청난 양이기 때문에, 이를 요약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군요,

: 그래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주시면 안 될까요?

 

: 일단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의 죽음에 대한 견해 차이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서양인들에게 윤회의 사고가 거의 드물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에 “재탄생Karma”이라는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윤회는 동양 사상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세계관입니다.

 

나: 사실 서양인에게 죽음은 삶이 끝나는 시점으로 이해됩니다. 삶이라는 과정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연속이지요. 그래서 서양인들은 죽음을 하나의 비극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너: 그렇군요. 신은 영생을 누리지만,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을 비켜갈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안 되는 줄 얼면서도 처절하게 저항할 수 있는 방도는 오로지 자살밖에 없었습니다.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아이아스Αἴας」를 생각해 보세요.

 

5.

나: 아, 그래서 서양의 비극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시간적 종말로 수용되어왔군요.

너: 잘 지적하셨네요.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죽은 자는 어두컴컴한 지하 명부의 세계에 영원한 그림자로 서성거리며, 기독교가 도래한 뒤에는 천당과 지옥이라는 영역이 자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유형에 관해서는 단테의 『신곡』에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나: 네, 「지옥」 편에는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라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가 있습니다. 단테는 지옥을 두 개로 포개진 원 뿔 모양의 공간으로 묘사했습니다.

너: 어쨌든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서양인들은 죽음을 삶의 종말,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춥고 어두운 영역으로 향하는 출구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요약하건대 죽음은 서양에서는 대체로 비극적 사건이었지요.

 

나: 인간의 목숨은 실타래의 실과 같아서, 클로토Klotho가 실을 풀면, 라케시스Lachesis가 감고, 모이라Moira가 그것을 끊어버리지요?

너: 네, 전 시인도 이와 비슷하게 묘사한 바 있어요. “내 얼레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시간이 연실처럼 풀려나간다.” (「산벚꽃」). 모이라의 사형 집행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죽음의 여신은 인간의 목숨을 그냥 앗아갑니다. 어떠한 막강한 신도 이를 막을 수 없지요. 죽음은 운명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도래하면서 회개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예외적으로 운명을 비켜갈 수 있게 됩니다.

 

6.

나: 선생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지요? 서양에서 죽음은 비극적인 종말로 이해되는 데 비해, 동양에서 그것은 대체로 다른 생으로부터 변모로 받아들여진다고요..

: 네. 비근한 예로 서양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엄청난 사건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동양인들은 그것을 극적인 사건으로 수용하지 않고, 하나의 자연스러운 변모로 받아들입니다. 동양인들은 윤회 사상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 동양사상의 경우 인간의 삶에서 재탄생의 의미가 강화되어 있지요?

: 그렇습니다. 불교의 경우 윤회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입니다. 불교 신자들은 죽음 자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지요. 죽음이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의 변화 과정이 고통을 안겨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