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국 문학

(명시 소개) 박현수의 시, 「‘응’이란 말」(2)

필자 (匹子) 2021. 1. 17. 10:50

박현수: 겨울 강가에서 예언서를 태우다 (울력, 2015, 71쪽 이하.)

 

: 앞에서 우리는 박현수의 시작품을 미시적으로 고찰해 보았습니다. 시 「‘응’이란 말」은 사랑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구명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적 주제와 관련되는 거시적인 제반 문제점을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령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사랑을 차단시키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강제적 성윤리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파생되는 사회 심리적 하자를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 아, 네. 오늘날에 이르러 강제적 성윤리는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동성애에 관한 논의에서도 많은 편견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개인 내지 가족 구성원을 고려할 때 강제적 성윤리는 남한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한 여성은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애인과의 합방을 거부하면서, 돈까지 건네주면서 홍등가로 가라고 권하기도 하지요.

: 이 경우는 하나의 순결 이데올로기의 폐해에서 비롯된 하나의 범례지요. 나를 심리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의 몸을 탐하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 이는 여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남성들 역시 혼전 동정을 지켜야 한다는 관습도 있지요. 라이히는 성의 억압이 비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권위적인 인간형을 양산시키고, 심리적 질병을 초래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금욕의 타당성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성의 문제로 갈등을 느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혹시 “사랑의 삼겹살”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사실 5포 세대의 젊은이들은 경제적 문제로 심리적 고통을 느끼지만, 사랑과 성의 문제로 삼중고를 겪고 있지요. 첫 번째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순결 이데올로기를 가리키고, 두 번째 문제는 성병과 에이즈에 대한 두려움을 지칭하며, 세 번째 문제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되지요. 그래서 남한의 많은 젊은이들은 서양의 젊은이들에 비해서 혼전동거를 껄끄럽게 여깁니다.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주어진 현실적 조건 내지 사회적 인간관계가 개개인의 내밀한 성적 자유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그렇습니다. 순결 이데올로기는 개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혼전 동거를 방종한 삶으로 매도하는 사회적 통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사랑과 성을 항상 연관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러셀 바노이Russell Vannoy 같은 철학자는 “사랑 없는 성”의 가능성에 관해 논하기도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사랑이 개입되지 않은 성은 추악하고 더러우며, 성이 개입되지 않은 사랑은 추상적 허상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과 성은 항상 결부시켜 이해해야 할까요? 달리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사랑이 배제된 성을 무조건 부도덕하다고 매도하는 태도는 정말 온당한 것일까요?

 

: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랑과 성은 객관적 토론이 가능할 만큼 간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 문제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 동물들은 남이 보든 말든 공개적으로 성교하지만, 혼자 숨어서 무언가를 먹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남이 보든 말든 공개적으로 밥을 먹지만, 숨어서 성교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성의 문제로 갈등을 느끼는 반면에, 동물들은 갈등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모든 심리적 질병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상황적 갈등에서 기인합니다.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쿠제와 같은 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이 이룩한 문명을 병적이라고 진단했지요.

 

: 최근에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인간은 차제에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에 신이 누렸던 권능을 누리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미래의 인간은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그리고 비유기체 합성의 기술 등으로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모든 삶의 행복을 만끽하게 되리라고 합니다.

: 그의 주장은 너무나 낙관주의적으로 들리는 군요, 마치 성적 욕구 또한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처럼 들립니다.

 

나: 김상일 박사는 자신의 저서 『호모 데우스 너머 호모호모』(동연 2020)에서 하라리의 낙관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인간은 차제에 업그레이드 될 것이 아니라, 다운그레이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무슨 뜻이지요?

: 다시 말해서 인간은 지금까지 뇌의 “신피질 Cortex”을 너무 과도하게 발전시켜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능적 측면을 좌시하거나 무시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성격 내지 콤플렉스는 그 자체 수많은 상흔의 결집체로서 신피질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폭력과 야만적 이기주의의 고리를 차단시키려면, 인간은 인간 동물로서의 고유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김상일 교수는 주장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 자리하는 “보노보 Bonobo” 족이 바로 호모 호모의 이상적 삶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이론에 관해서는 납득할 수 있는데,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요?

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성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의 본능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생태 공동체의 실험도 있으니, 무조건 힘들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기우라고 여겨지는데요?

: 그렇다면 19세기 중엽에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가 구상한 팔랑스테르 공동체 내의 자유로운 삶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 하나의 대안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게 유일한 방식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백년해로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니까요? 이러한 견해 역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사랑의 삶의 방식에 대해 관대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푸리에의 공동체 속에는 노동의 삶과 정념의 삶이 어떠한 구속도 받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영위되고 있습니다. 공동체 내에는 결혼한 부부도 존재하지만, 결혼 제도는 처음부터 파기되어 있습니다. 푸리에는 공동체에서의 일부다처 내지 다부일처의 생활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 누군가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고 물을 때, 처음 만난 다른 사람이 “응”하고 대답할 수 없는 상황 역시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요?

: 그렇습니다. 독일의 극작가 하이너 뮐러 Heiner Muell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서로의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 - 이것이 바로 현대 문명이 창조한 비극적 삶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사랑의 삶에 관한 사회적 심리적 실험은 방향이 어디로 향하든 간에 좌충우돌 지속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