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탈스파냐

서로박: 돈키호테 다시 읽기 (2)

필자 (匹子) 2023. 4. 29. 10:10

(앞에서 계속됩니다.)

 

7. 사랑하는 임의 상을 사랑할 뿐이다.: 임을 애타게 갈구하면, 만남은 성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가요?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남자는 그미를 사랑하는 대신에, 스스로 갈구하는 임의 상만을 사랑합니다. 돈키호테는 (비록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의 행위를 필요로 하는 현실과 직접 부딪칩니다. 현실 속에는 자신의 갈망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생각할 때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미는 하나의 명상으로서 돈키호테의 뇌리 속에서만 출현할 뿐입니다.

 

친애하는 T, 언젠가 독일의 작가 투콜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키 크고 날씬한 분을 갈구하지만, 작고 뚱뚱한 분을 얻는다. 그게 삶”이라고 말입니다. 둘시네아는 아주 가까운 곳, 토보소에 살고 있는, 속된 표현으로 이목구비가 그냥 달려 있는 추녀입니다. 그런데도 돈키호테는 그미를 최고의 미녀로 착각하고, 가급적이면 그미를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키호테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립니다. 즉 그미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며, 그렇기에 언제나 그미로부터 떠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8. 시대착오성에서 비롯한 이별의 정서, 체념의 미학: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젊고 매력적인 약혼녀 레기네 올젠 Regine Olsen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수사의 길을 걷고 싶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결혼생활로 인하여 행여나 그미에 대한 깊은 사랑이 파괴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사랑하는 임과 이별함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으리라. 파혼 후에 어리석은 철학자는 항상 그미를 그리워하였으며, 행여나 그미가 자살할까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항상 레기네를 그리워하며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레기네 올젠이 받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후회의 편지 그리고 유산으로 남긴 그의 저작물이었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키르케고르처럼 행동합니다. 실제 현실에서 둘시네아에 대한 사랑을 처음부터 포기함으로써, 마음속으로 가장 커다란 위안을 얻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친애하는 T, 돈키호테의 경우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타난 이별의 정서 내지 체념의 미학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는 엄밀히 따지면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것입니다. 21세기의 지금 여기를 의식한다면 오히려 “사랑하면 뺏어라”라는 전언이야 말로 만고불변의 진리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9. 돈키호테, 다른 시대를 생각하며 지금 여기서 몽유하다.: 그렇다면 안타까운 점은 대체 무엇인가요? 그것은 돈키호테에게 둘시네아의 모습을 인지할 감각적 수단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돈키호테는 깨어있는 꿈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실존을 마냥 시험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희망의 세계는 자신에게는 실제 세계입니다. 그것은 기사들의 전설 그리고 그들이 추종하는 여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주인공은 바로 이러한 희망의 세계 속에 그리고 갈구하는 세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세계가 -제한적인 의미에서 고찰할 때- 결코 천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둘시네아는 그 자체 “발견될 수 없는 여인 la femme introuverble”입니다. 그미는 오히려 꿈속의 현재형으로 출현합니다. 돈키호테는 그미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미를 애타게 갈망하지만, 그미는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 별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환상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완전한 여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이러한 상이 깨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돈키호테 그리고 둘시네아 -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그림자를 쫓는 젊은 청춘남녀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습니다.

 

10. 돈키호테는 문학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반증하고 있다. (1): 소설『돈키호테』는 소재 상으로는 무척 흥미진진하나, 주제의 차원에서 고찰할 때 우리를 기절초풍하게 만듭니다. 전반적으로 문학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소통의 단절 내지 몰이해 현상을 생각해 보세요. 실제로 돈키호테는 자신을 고결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거룩한 마음으로 전쟁터로 나가는 영웅적 전사로 생각합니다.

 

이에 비하면 동시대인들은 이상한 갑옷으로 무장한 미치광이 얼간이로 취급하며 그에 대해 조소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오해치고는 너무나 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문학 가운데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영향을 끼친 작품이 소통의 단절 내지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세르반테스의 작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수용되는 경우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11. 돈키호테는 문학의 몰이해를 단적으로 반증하고 있다. (2): 두 가지의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는 김지하의 『밥』에 언급되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봄날 광대부부는 이 마을 저 마을로 유랑하고 있었습니다. 강물이 녹아서 강가에는 얼음이 녹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강을 건넜을 때, 뒤따라오던 아내가 그만 강에 빠진 게 아니겠습니까? 광대는 아내를 구할 밧줄도 없고, 발만 동동 굴렸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행인들은 광대가 춤을 잘 춘다고 박수만 치고 있었습니다.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는 1920년대에 독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극작품을 관람한 노동자들은 작품 속에 도사린 계급갈등을 간파하지 못하고, 등장인물 매키의 노래, 「매키의 칼」만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크리스타 볼프의 『카산드라』를 예로 들어봅시다. 카산드라는 트로이 전쟁을 예언하고 사전에 엄청난 재앙을 경고했으나, 트로이 사람들은 그미를 마치 늑대 소년과 같은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카산드라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사전에 전란의 위험을 간파했더라면, 그들은 10년 동안 피터지게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며, 도시 국가의 몰락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12. 문제는 소시민의 의식이다.: 돈키호테는 고결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도에 나선 무사였습니다. 그는 불의를 바로잡고, 안타깝게 감옥에 갇힌 공주를 구하며 사악한 적을 물리치려는 계획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의 기괴한 모습을 바라보고, 미치광이로 곡해합니다. 골목길에서 싸우다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그는 거룩한 기사가 아니라, 건달로 취급당합니다. 주먹질하고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는 정신 나간 인간이 돈키호테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몰이해 (沒理解)가 인간 삶에서 가장 커다란 문제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시민들이 지식인들의 혁명적 행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로마 병정들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하고 말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체게바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반 사람들이 “더 많은 월남을!” 하고 외치며 볼리비아로 떠난 체 게바라를 이해하고 그의 꿈에 동조하며 도움을 주었더라면,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게릴라 사냥꾼이 발사한 총탄에 의해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몇 지식인들은 남한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학 입시와 관련되는 교육개혁의 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학부형들은 자신의 자식의 좋은 대학에만 골몰할 뿐입니다. 소시민의 의식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때로는 사회의 더 나은 변화에 악재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