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카치오의 또 다른 작품: 흔히 “보카치오”하면, 학생들도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을 떠올립니다. 사실 『데카메론』은 14세기 이탈리아의 상류층의 무사안일주의 내지 현실 방관적 자세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풍자 문학의 토대를 닦은 명작입니다. 이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대단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언젠가 이 작품을 다루었기 때문에 재차 언급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작품이 널리 회자되면, 다른 작품들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보카치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보카치오의 또 다른 작품 속에서 아직 보상받지 못한, 보카치오 문학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보카치오의 장편 소설, 『피아메타Fiammetta』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1343년에서 1344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이 작품이 서양에서 출현한 첫 번째 심리소설이라는 사실입니다.
2. 피아메타, 사랑의 행복과 고통을 필설로 남기다.: 보카치오는 집필 이후에 『피아메타』를 여러 번 수정하였습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바로 이 수정본입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집필하기 6년 전에 이 작품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작가는 이전에 출현했던 위대한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모방하려고 했으며, 등장인물들의 특유한 심리적 갈등을 세밀하게 기술하려고 했습니다. 작품의 원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아메타 부인의 비가라고 명명된 책은 그미로부터 사랑받은 여인들에게 전해지다Il libro chiamato Elegia di Madonna Fiammetta da lei alle innamorate donne mandato”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피아메타 부인이 쓴 편지인데, 피아메타 부인은 사랑으로 고뇌하면서, 자신의 심경 그리고 어떤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사랑받는 여인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소설은 1인칭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아홉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주인공 피아메타는 “고상한 여성들nobli donni”에게 자신의 후회막급의 심정을 전합니다. 그미가 사용하는 문체는 비가의 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의 후회스러운 과거를 언급하는 데 적절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마지막 제 9장은 다시금 책 자체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지막 장은 프롤로그와 함께 소설적 내용의 틀을 갖추고 있습니다.
3. 유부녀와 총각 사이의 뜨거운 사랑: 피아메타 부인은 자신이 남편 몰래 판필로라는 젊은이를 사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그와 함께 보낸 나날 등을 차례로 서술합니다. 그미는 마치 변덕스러운 포르투나 여신처럼 자신의 실수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회고합니다. 포르투나 여신의 사원에서 처음으로 늠름한 사내인 판필로와 조우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판필로와 피아메타 부인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사랑을 통한 지고한 행복 그리고 사랑의 비극적인 전환을 동시에 예견합니다.
맨 처음 판필로와 눈이 마주쳤을 때 피아메타 부인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작가는 이 순간 피아네타 부인이 겪었던 자기애의 경험을 세밀하게 서술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과 성품이 무엇보다도 사랑을 통해서 발전되는 것을 느낍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독백을 통해서 그리고 판필로와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감지한 바 없는 언어적 표현 능력을 습득합니다. 피아메타 부인 곁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는 시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조언하지만, 피아메타 부인의 감정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4. 영원한 이별인가, 일시적인 이별인가?: 판필로는 피아네타 부인에게 멀리 살고 계시는 아버지를 방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그미는 사랑하는 임이 멀리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합니다. 제 3장은 판필로가 여행을 떠난 뒤의 시간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오비디우스Ovid의 『사랑의 치유Remedia amoris』를 읽은 다음에 오비디우스가 추천한 바를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하는 임을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재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미는 상상의 세계를 서술하면서 임과의 가상적 만남을 뇌리에 떠올립니다.
판필로가 돌아오겠다고 말한 시간이 지나게 되자, 피아네타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우울의 심연에 빠져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미는 자신의 가라앉는 감정에 어디서 유래하는지 발설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상인 한 사람이 나타나서 피아네타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합니다. 즉 판필로가 그 사이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상인이 전해준 소식으로 인하여 더욱더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1878년에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그린 피아메타의 초상화
5. 쉽사리 느꼈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남편은 어째서 자신의 아내가 그토록 슬픔에 잠겨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피아네타 부인의 기분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그미와 함께 떠들썩한 장터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에 피아네타 부인이 판필로와 함께 웃고 즐거워하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 - 그곳은 피아네타 부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그미는 혼자 지내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시녀와 함께 사원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절망감을 다스리고 신에 대한 겸허함과 순종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미는 기도하면서, 자신을 책망합니다. 자신을 죄지은 여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신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6. 사랑의 강도는 이별의 과정에서 증명된다.: 제 6장에서 한 가지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판필로가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었고, 어떤 다른 여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이 사실을 접하게 되자, 엄청난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포기하려고 해도, 이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픈 마음을 영원히 치유하기 위해서 자살을 결심하지만, 주어진 정황은 그미의 자살을 방해하곤 합니다.
피아네타 부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던 시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미를 도우려고 합니다. 예컨대 시녀는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면서, 어느 누구도 포르투나 여신의 속내를 간파할 수 없다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피아네타 부인은 남편의 도움으로 순례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미는 여행 도중에 판필로와 다시 만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판필로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이가 도시로 귀환했다고 말해줍니다. 그가 다른 남자임이 밝혀졌을 때 피아네타 부인은 몹시 실망스러워 합니다.
7. 모든 이야기는 실제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실제 경험은 기억 속에 남고, 경험의 일부만이 문학 작품 속에 승화되어 있다.: 제 8장에 이르러 피아네타 부인은 줄거리의 비극적 내용을 거론하지 않고, 고대의 여성들의 불행한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아네타 부인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보카치오는 실제로 마리아 다키노Maria d'Aquino는 유부녀와 일시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러한 놀랍고도 강렬한 경험이 소설 집필의 계기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다키노는 나폴리의 군주인 로베르토 안주의 딸이었는데, 보카치오를 만나서 사랑의 열정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여인의 입장, 다시 말해서 마리아 카티노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고, 세밀하게 서술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사랑했던 마리아 다키노에게는 여동생 피아메타가 있었는데, 보카치오는 여기서 주인공의 이름을 착안한 것 같습니다.
8. 보카치오에게 영향을 끼친 작품들: 보카치오는 집필 과정에서 오비디우스의 『위대한 여성들의 편지들Heroides』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오비디우스는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남녀의 편지를 재구성하여 라틴어로 집필했는데, 몇몇 남자들의 편지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특히 메데아가 이아손에 보내는 글발, 아리아드네가 사랑하는 테세우스에게 보내는 글발 그리고 디도가 아이네이스에게 보내는 글발은 압권입니다. 보카치오는 오비디우스의 문헌 외에도 단테 그리고 페트라르카의 작품에서도 많은 것을 차용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건대 단테의 『신생Vita Nuova』과 주제 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페트라르카에게서도 많은 것을 수용했습니다. 페트라르카는 사랑하는 라우라가 죽은 뒤에 그미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시집 『소네트와 칸소네Canzoniere』에 담았습니다.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복합적 감정을 “괴로움의 쾌락voluptas dolendi”으로 명명한 바 있는데, 보카치오는 이를 자신의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9. 현대적 사랑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보카치오의 작품은 모방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단순한 젊은 여성을 선택함으로써 어느 누구라고 하더라도 사랑의 행복 그리고 사랑의 질곡에 빠져들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작가, 니콜로 토마세오Niccolò Thommaseo는 보카치오의 『피아메타』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작품에 담겨 있는 인간 고유의 심리적 상태를 강조하면서, 이탈리아 문학 최초의 심리 소설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보카치오의 소설은 독자의 커다란 흥미를 기대할 수 없지만, 최소한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을 겪는 분에게 도움이 되는 문헌인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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