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서로박: 계몽주의와 절대 왕정시대의 유토피아 (2)

필자 (匹子) 2020. 9. 26. 06:58

6. 기하학적 구도와 평등 사회: 모어, 캄파넬라, 안드레애 등의 유토피아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출현하였으며, 모두 정확한 기하학적 구도에 의해서 축조된 것이었습니다. 기하학적 구도의 건출물은 기능주의를 고려한 만인 평등의 사회 구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수직적 계층구도에 입각한 중세 도시의 범례와는 기능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이질적 특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근대에 출현한 국가의 기하학적인 모델입니다. 근대 국가의 기하학적 구도는 데카르트의 『기하학 Le Géométrie(1637)에 의해서 더욱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모든 유토피아의 건축물에 있어서 수학의 토대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르네상스 시대의 정태적 기하학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기하학적 틀로 정착됩니다. 그밖에 토마스 홉스는 구체적인 기하학적 구도에 의해서 자신의 사회 계약 이론을 설계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국가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생산품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윤리라든가 정치 역시 기하학적 모델에 의해서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축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자연을 창조했듯이, 인간은 인위적인 무엇, 즉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를 얼마든지 역동적으로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계약으로서의 국가: 사람들은 국가도 계약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약으로서의 국가는 신에 의해서 예정된 것이 아니며, 인간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축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자유롭고 평등한 개별 인간들이 공동으로 합의한다는 전제 하에서 지배 구도는 얼마든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게 이를테면 토마스 홉스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법의 정신에 의거한 사회 계약 이론의 저변에 깔린 것입니다.

 

국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에 의해서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은 세습되는 왕권을 무조건 용인할 수 없다는 함의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야 말로 어째서 사획 계약이론이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칸트의 표현을 빌면 국가의 법적 이상은 하나의 계약에 의해서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사회 계약으로써 국가의 이을 정립하고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사회 유토피아와 사회 계약 이론 사이의 공동성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8. 계몽주의의 문제점. 계몽이 지닌 야누스의 얼굴: 계몽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찬란한 정신사의 시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절대 왕권이 지배하던 시기였지만, 놀랍게도 자연법의 정신 그리고 사회 계약에 관한 이론이 만개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고들은 왕의 권한 자체가 결코 신으로부터 하달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연법 학자들이 군주에 대해 무조건 저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연법 사상가, 알투시우스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의 행위에 어떤 법적 정당성을 부여한 반면에 돌바크 d’Holbach는 계몽적 군주 내지 “시민 왕”을 갈구하였습니다. (장세룡 B: 427). 바로 이러한 계몽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계몽주의가 당시 사람들에게 찬란한 자유를 구가하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새로운 강제적 국가를 잉태하게 만들었습니다. (Grimminger: 128f).

 

물론 안젤름 포이어바흐 그리고 세자레 베카리아 등과 같은 자연법 학자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창하면서, 사형 제도를 비난하였지만, 볼프, 푸펜도르프 등과 같은 자연법 학자들은 왕권을 더욱더 공고히 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블로흐: 229). 계몽주의가 종교적 관용사상을 실천하고, 정치적으로도 진보적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계몽주의의 사상은 부분적으로 왕권 통치를 더욱더 강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계몽주의의 추상적 전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실 사회에서 반동적 정치관과 접목되었으며, 현실의 개혁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를 파기하거나 무조건 미래로 연기하게 하게 하였습니다. 현실의 개혁과 혁명적 의지를 무조건 먼 미래로 연기해버리는 계몽주의의 머뭇거림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성스러운 날 St. Nimmerleinstag과 연동되어 추후에 하나의 취약점으로 지적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정치적 영역과 미적 철학적 영역으로 분리된 사고를 낳았으며, 이후에 나타날 질풍과 노도의 열광적 급진주의를 태동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